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1화 · 종말의 날

하늘이 피 색이었다.

2035년 서울. 인류의 마지막 방어선은 무너진 빌딩 옥상 하나였다. 남은 헌터는 네 명.

나는 금 간 장검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코를 가로지른 흉터 위로 재가 내려앉았다. 어깨까지 자란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목에 들러붙었다. 흰 줄 한 가닥이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찢어진 검은 코트 자락이 뜨거운 바람에 펄럭였다.

마지막 S급 헌터, 강이현.

탄 냄새가 났다. 철근 녹는 냄새, 아스팔트 끓는 냄새. 그 밑에 깔린 비린내는 맡지 않으려고 숨을 얕게 쉬었다.

"가만히 계세요. 또 덧나요."

차예린이 내 왼팔을 붙잡고 있었다. 꿀빛 금발이 내 어깨로 흘러내렸다. 손바닥에서 금빛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빛도 같이 떨렸다.

"손 떨리잖아. 그만해."

"이 손으로 십 년 버텼어요."

그녀가 웃었다. 처진 호박색 눈이 반달이 됐다.

"오늘 하루쯤이야."

그 손은 십 년 전부터 떨렸다. 그녀가 스물여섯이던 봄, 사이비 교단에 끌려가 3년 동안 빛을 뽑히고 나온 뒤로. 치유할 때마다 떨렸다. 그래도 그녀는 한 번도 치유를 멈춘 적이 없었다.

옥상 난간 쪽에서 치직, 하는 소리가 났다.

"번개가 또 안 나와."

한소율이 자기 손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자 앞머리 아래 보라색 눈이 짜증으로 가늘어졌다. 손끝에서 보라색 불꽃이 피었다가 금방 꺼졌다. 십 년 전의 그녀라면 하늘을 갈랐을 번개였다.

"망가진 건 망가진 거지, 뭐."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1년 동안 혼자 갇혀 있던 탑에서 나온 뒤로, 그녀의 번개는 그렇게 됐다. 구조대에 나도 있었다. 그녀를 꺼낸 게 나였다. 그녀는 그 얘기를 하면 화를 냈다.

스윽.

서윤하가 칼을 갈던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 은빛 포니테일이 반쯤 풀려 있었다. 왼쪽 무릎에 감은 붕대가 바지 밖으로 비죽 나와 있었다.

"대장. 내일 아침엔 제가 앞에 설게요."

"넌 다리 때문에 안 돼."

그녀가 붕대 감은 무릎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십 년 전에 다친 다리예요. 이제 핑계도 안 돼요."

십 년 전, 첫 게이트가 열린 날. 서울역 광장에서 그녀는 오우거 앞에 쓰러졌다. 무릎이 부서졌고, 그녀 뒤에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비만 오면 다리를 절었다.

그날부터 셋은 하나씩 평생의 상처를 얻었다. 무릎, 손, 번개.

나는 늘 한발 늦었다.

"살아남으면 고기."

소율이 난간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대장 돈으로."

"……나 돈 없어."

예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십 년째 백수네요."

윤하까지 웃었다. 소리 내서. 그녀가 그렇게 웃는 건 오랜만이었다.

S급 헌터가 무슨 백수냐고 따지려다 그만뒀다. 맞는 말이었다. 길드 월급은 셋의 치료비로 다 나갔다. 내 통장은 십 년 동안 늘 비어 있었다. 그걸 셋 다 알았다.

"……그래. 살아남으면."

말해 놓고 셋의 얼굴을 하나씩 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십 년 동안 미뤄 둔 말. 살아남으면 하자고 또 미뤘다.

* * *

쿠구구구.

하늘이 찢어졌다.

붉은 하늘 한가운데가 갈라지며 그것이 내려왔다. 검은 뿔로 엮은 왕관, 도시를 통째로 덮는 그림자, 빨간 눈 두 개.

심연의 군주.

"대장, 뒤로!!"

윤하가 내 앞으로 뛰었다. 다친 무릎으로. 절뚝이지도 않았다.

"이번엔 제가 지켜요."

예린이 내 등을 감쌌다. 떨리는 손바닥을 활짝 펴서. 금빛이 우리 넷을 덮었다.

"마지막이니까 아끼지 말자."

소율이 두 손을 하늘로 뻗었다. 망가졌다던 번개가, 십 년 만에 하늘을 갈랐다. 보라색 기둥이 군주를 향해 솟구쳤다.

군주가 손을 내렸다. 붉은 파도가 옥상을 덮쳤다.

콰아아.

빛이 터졌다. 붉은빛과 금빛과 보랏빛, 그리고 은빛. 눈을 뜰 수 없었다. 그 빛 속에서 세 사람의 손이 나를 뒤로 밀어냈다. 마지막까지, 계속.

빛이 걷혔을 때 옥상에는 나 하나였다.

바닥에 셋이 남긴 것이 있었다. 반쯤 탄 은색 머리끈. 금빛이 꺼진 묵주. 그리고 번개에 녹아 붙은 보라색 장갑 한 짝.

"안 돼……."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목소리였다.

* * *

칼자루를 쥔 손에 피가 고였다. 가죽 밑에 새겨 둔 이름 셋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일어섰다. 남은 마력을 전부 칼에 밀어 넣었다. 십 년 동안 한 번도 끝까지 써 본 적 없는 마지막 식.

"단월 종식!!"

칼끝에서 초승달이 아니라 만월이 떨어져 나갔다. 보랏빛 달이 하늘을 가로질러 군주의 가슴에 박혔다.

쩌어엉.

군주의 가슴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 붉은 것이 떨어져 내렸다. 주먹만 한 붉은 조각. 군주의 핵에서 깨져 나온 것이었다.

옥상 바닥에 떨어지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탁.

치이익.

손바닥이 타들어 갔다. 놓지 않았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낯익은 구두 소리였다.

"……건우 형?"

흰 정장에 재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뒤로 넘긴 회금발, 금색 눈, 얇은 미소. 백광의 길드장 백건우. F급이던 나를 길드에 넣어 주고, 첫 장검을 쥐여 준 선배였다.

"수고했어, 이현아. 마지막까지."

그가 다가왔다. 내 옆에 섰다. 갈라진 군주를 올려다봤다.

"같이 막자. 저놈 핵이 깨지고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다시 들었다.

푹.

등이 뜨거웠다. 차가운 쇠가 갈비뼈 사이로 들어왔다가 아주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십 년 동안 듣던 그대로.

"넌 너무 잘 싸워. 그래서 곤란해."

"백건우!!"

목에서 피가 넘어왔다. 무릎이 꺾였다.

그가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군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손하게, 오래 연습한 사람처럼.

"이제 이 세상은 제 겁니다."

아무도. 못 지켰다.

【경고】 【조건 충족 — 종말의 목격자】 【인류 마지막 생존자의 죽음을 확인합니다】

……뭐야, 이건.

마지막 생존자. 백건우는 저기 살아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데 창은 나를 마지막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저건 이제 사람으로 세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회귀】 【모든 것을 잃은 자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드립니다】 【회귀를 시작합니다】

파앗.

몸이 흰 빛가루로 흩어졌다. 손에 쥔 붉은 조각만 끝까지 뜨거웠다.

* * *

벌떡.

몸이 먼저 일어났다. 숨이 목에 걸려 쇳소리가 났다.

……꿈?

하아. 하아.

곰팡이 냄새, 덜 마른 빨래 냄새, 어젯밤 먹다 둔 컵라면 국물 냄새. 팔을 뻗으면 벽이 닿았다. 창문은 공책만 했다. 신림동 고시원이었다.

책상 위 휴대폰을 집었다. 손이 떨려서 두 번 놓쳤다.

2025년 4월 12일. 오전 7시 3분.

손을 봤다. 흉터가 없었다. 칼을 쥐어 본 적 없는 손이었다.

손거울을 들었다. 흉터 없는 콧등, 짧고 덥수룩한 흑발, 흰 줄 하나 없는 머리. 짙은 회색 눈 밑에 다크서클만 선명했다.

스물다섯.

정말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다들, 아직 살아 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손등으로 눈을 눌렀다. 눌러도 소용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었다. 소리가 새어 나갔다.

쿵쿵.

벽이 울렸다.

"아침부터 누가 울어! 실연당했냐!!"

옆방 아저씨였다. 10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네. 비슷해요."

"젊은 놈이 청승은. 라면이나 끓여 먹어!"

벽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 고함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 * *

눈가를 닦자 눈앞에 창이 떴다.

【알림】 【회귀가 완료되었습니다】 【기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이게 왜 여기서도 보여.

손을 뻗었다. 허공에 손끝이 닿자 창이 바뀌었다.

【상태창】 【이름: 강이현 / 레벨: 1】 【직업: 회귀자】 【근력 8 / 민첩 9 / 마력 4】 【고유 스킬: 회수】 【잠긴 기억: 레벨 10에 열림】

레벨 1. 처음 각성했을 때 그대로다.

그런데 회수? 이런 스킬은 없었다. 전생에 내가 받은 고유 스킬은 각성하고 석 달 뒤에야 생겼고, 이름도 '근성'이었다.

【고유 스킬: 회수 Lv.1】 【쓰러뜨린 적의 스킬 하나를 빼앗는다】 【빼앗은 스킬은 영구 보유】

남의 스킬을 빼앗는다고?

이 세계의 각성자는 스킬을 하나 받는다. 운이 좋으면 둘. 평생 그걸로 먹고산다. 그런데 빼앗는다.

"……조건은?"

【한 번의 싸움에 한 번만】 【대가: 마력 전부 소모】 【레벨 차이 30 이상이면 실패】

공짜는 없었다. 마력 4로는 딱 한 번이다.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내려다봤다.

손바닥 한가운데 붉은 자국이 있었다. 동전만 한. 화상처럼 보였는데 아프지 않았다. 군주의 조각을 쥐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넌 뭐야. 왜 나야."

【안내】 【답변 권한이 없습니다】 【대신 하나 알려 드리죠 — 지금은 7시 5분입니다】

"……시계는 나도 봐."

대답은 없었다.

* * *

7시 5분. 토요일.

오늘 오전 9시, 서울역. 첫 게이트가 열린다.

그리고 오늘, 윤하는 오우거 앞에 쓰러진다.

【숨겨진 퀘스트】 【그녀들을 지켜라】 【서윤하 — 남은 시간 1시간 55분】 【차예린 — 남은 시간 7일】 【한소율 — 남은 시간 30일】 【실패하면 — 세계 멸망】

1시간 55분.

몸이 저절로 일어섰다. 그러다 멈췄다.

이 몸은 레벨 1이다. 근력 8, 민첩 9. 전생 레벨 1의 나는 고블린을 보고 도망쳤다. 십 년 치 싸우는 법은 머릿속에 있다. 이 몸에는 없다. 가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습게도 손이 떨렸다. 군주 앞에서도 안 떨던 손이.

협회에 전화할까. 하늘이 갈라진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는다. 경찰에 신고할까. 정신병원 구급차가 먼저 올 것이다.

안 가면, 나는 산다.

십 년 전에 다친 다리예요.

붕대 감은 무릎을 두드리던 손이 떠올랐다. 이제 핑계도 안 돼요, 하고 웃던 얼굴. 그 다리로 마지막까지 내 앞에 섰다.

그래도 간다.

책상 위 휴대폰에 엄마 문자가 와 있었다. [밥은 챙겨 먹니. 면접 잘 보고.] 전생의 나는 이 문자에 답을 안 했다. [응. 엄마도.] 짧게 쳐서 보냈다.

회색 트레이닝복 위에 점퍼를 걸쳤다. 운동화 끈을 묶다가 손이 떨려 매듭이 두 번 풀렸다. 운동화를 포기하고 문 앞 슬리퍼에 발을 꽂았다.

쾅.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번엔, 늦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