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31분. 슬리퍼로 뛰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탁탁탁. 신림역 앞 버스 정류장까지 달렸다. 마침 서울역 가는 버스가 서 있었다. 계단을 뛰어올라 교통카드를 찍었다.
삐빅.
"잔액이 부족합니다."
기사가 나를 봤다. 뒤에 선 아주머니가 혀를 찼다.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 몇 개와 영수증 한 장.
십 년 만에 버스비 걱정이라니.
S급 헌터의 통장에는 늘 돈이 없었지만 버스비가 없던 적은 없었다.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뛰었다. 신림에서 서울역까지. 택시 승강장 줄은 길었고, 지하철은 갈아타야 했고, 내게는 1시간 반이 있었다.
결국 지하철역 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가 개찰구를 뛰어넘었다. 역무원의 고함이 등 뒤에서 들렸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꼭 갚을게요. 속으로만 말했다.
* * *
오전 9시 정각.
쩌저적.
서울역 광장 하늘에 금이 갔다.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광장 전체를 덮었다. 출근하던 사람들이 멈춰 섰다. 휴대폰 카메라가 일제히 위를 향했다.
파란 균열이 벌어졌다. 그 안에서 축축하고 비린 바람이 불어 나왔다.
세상의 첫 게이트였다.
나는 광장 입구 계단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찼다. 레벨 1의 몸. 여기까지 뛴 것만으로 무릎이 후들거렸다. 헉, 헉.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전생의 나는 계단 백 개쯤은 숨도 안 쉬고 올랐다.
끼기긱.
균열에서 초록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허리춤까지 오는 키, 누런 이빨, 녹슨 단검. 고블린이었다. 열, 스물.
"괴물이다!!"
비명이 터졌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캐리어가 넘어지고 커피가 쏟아졌다.
그 혼란 한가운데서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쪽으로! 뛰지 말고, 걸으세요!"
검은 제복이었다. 은색 테두리. 은빛 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가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역사 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가슴에 한국헌터협회 명찰이 달려 있었다.
서윤하. 협회 신입 요원, F급.
윤하.
숨이 멎었다. 발이 저절로 멈췄다. 스물넷의 서윤하였다. 아직 다리를 다치기 전. 붕대도 없고, 절뚝이지도 않는. 눈가에 그늘도 없었다.
어젯밤, 아니 십 년 뒤의 그 옥상에서 붕대 감은 무릎을 두드리던 사람이 저기 서 있었다. 두 다리로 똑바로.
목장갑을 낀 손이 떨렸다. 쥐었다 폈다. 그래도 떨렸다.
십 년을 싸운 내가.
그녀는 이날 얘기를 딱 한 번 했다. 전생 5년 차 겨울, 숙소에서 술을 마시던 밤이었다. 시계를 보고 있었대요, 오늘 점심 뭐 먹지 하면서. 그러다 하늘이 갈라졌대요. 그 말을 하며 그녀는 웃었다. 웃으면서 잔을 쥔 손을 식탁 밑으로 숨겼다. 떨리는 걸 들키기 싫어서.
그리고 그날 그녀 등 뒤에 있던 사람들 얘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 * *
비명 하나가 귀에 박혔다.
"사, 살려……."
광장 화단 옆에 할아버지 한 분이 넘어져 있었다. 지팡이가 저만치 굴러가 있었다. 고블린 하나가 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녹슨 단검을 질질 끌면서.
공사장 가림막 아래 쇠파이프가 굴러다녔다. 집어 들었다.
철컹.
생각보다 무거웠다. 팔이 처졌다.
고블린은 오른쪽 다리가 약하다. 전생에 수백 마리 잡았다. 놈들은 오른쪽 무릎 인대가 덜 여문 채로 태어난다. 덤빌 때 늘 왼발로 딛는다.
뛰어들었다. 고블린의 오른쪽 무릎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까앙.
빗나갔다. 쇠파이프가 보도블록을 때렸다. 손바닥이 울렸다. 머릿속의 궤적은 완벽했는데 팔이 반 박자 늦었다. 허리가 따라오지 않았다.
고블린이 돌아섰다.
슥.
왼팔이 화끈했다. 점퍼 소매가 갈라지며 피가 쏟아졌다. 균형을 잃었다.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슬리퍼 한 짝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광장 저편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아. 슬리퍼.
머리는 안다. 몸이 못 따라온다.
고블린이 히죽 웃었다. 누런 이빨 사이로 침이 흘렀다. 나는 바닥을 짚고 뒤로 기었다. 맨발 하나가 보도블록에 긁혔다. 할아버지가 그 틈에 지팡이를 짚고 기어서 달아나는 게 곁눈에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거 하나는.
* * *
광장 기둥 뒤로 굴러 들어갔다. 등을 기둥에 붙였다.
하아.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군주 앞에서도 안 떨던 놈이 고블린 앞에서 떨었다. 몸은 아직 겁먹는 법밖에 배운 게 없었다.
도망쳐. 몸이 소리쳤다. 전생의 오늘처럼.
숨을 골랐다. 하나, 둘. 그리고 봤다. 기둥 너머 광장을.
고블린들이 흩어져 있었다. 놈들은 아무나 공격하지 않았다. 넘어진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피를 흘리는 사람. 그쪽으로 몰렸다.
놈들은 무리 중 다친 놈부터 노린다.
전생 3년 차 고블린 굴 토벌에서 배운 것이었다. 피 냄새를 맡으면 다른 건 안 본다.
왼팔을 내려다봤다. 피가 손끝까지 흘러 목장갑을 적시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제일 다친 건 나.
그럼 미끼는 나다.
기둥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장 가장자리에 매점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어깨 하나 들어갈 만한 틈. 이 틈엔 한 마리씩밖에 못 들어온다.
무서웠다. 미끼가 된다는 건 진짜로 물린다는 뜻이었다. 전생의 나는 이런 계산을 남한테 시켰다. 너는 왼쪽, 너는 미끼.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매점 사이 틈으로 기어 들어갔다. 다친 팔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피 냄새가 퍼지게. 신음을 냈다.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 아팠다.
끼약.
한 마리가 고개를 돌렸다. 틈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왼발로 디디면서.
오른쪽 무릎.
빡.
쇠파이프가 놈의 무릎 옆을 때렸다. 이번엔 맞았다. 뼈 꺾이는 소리. 놈이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일어나 뒤통수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손목이 저렸다. 세 번째에 놈이 움직이지 않았다.
털썩.
틈 바닥에 주저앉았다. 매점 셔터에 등이 닿아 철판이 덜컹 울렸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한 마리. 겨우.
전생의 나라면 손가락 하나로 끝냈을 놈이었다.
* * *
【알림】 【조건 충족 — 적을 쓰러뜨렸습니다】 【고유 스킬 '회수'를 쓸 수 있습니다】
창이 눈앞에 떴다.
마력 전부. 쓰고 나면 다음 놈엔 맨몸이다. 오우거가 나오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쇠파이프로는 두 번째 놈도 무리였다. 틈 밖에서 또 다른 놈이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쓴다. 회수."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쓰러진 고블린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와 내 손끝으로 흘러 들어왔다. 스으으. 차갑고 미끈한 감각이었다. 손바닥의 붉은 자국이 아주 잠깐 뜨거웠다.
【스킬 회수】 【'고블린의 단검술'을 회수했습니다】 【마력 4 → 0】
【스킬 정보】 【고블린의 단검술 Lv.1 / 등급 F】 【단검을 다루는 몸의 감각을 얻는다】 【익숙해질수록 레벨이 오른다】
F급. 그래도 이 몸이 얻은 첫 기술이었다.
【안내】 【전생 S급께서】 【첫 스킬로 '고블린 것'을 얻으셨습니다】
"……시끄러."
기록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십 년 동안 본 상태창 중에 이렇게 얄미운 건 처음이었다.
* * *
죽은 고블린의 손에서 단검을 뽑았다. 녹이 슬어 있었다. 손잡이에서 짐승 냄새가 났다.
끼아악.
두 번째 놈이 틈으로 뛰어들었다.
칼을 그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스킬이 이끄는 대로 팔이 뻗었다.
삭.
얕았다. 칼끝이 흔들렸다. 놈의 어깨만 긁고 빗나갔다.
퍽.
놈의 주먹이 내 옆구리를 쳤다. 숨이 컥 막혔다.
칼끝이 흔들린다. 손목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고블린의 단검술은 손목을 쓰는 기술이 아니었다. 고블린은 팔이 짧다. 놈들은 어깨로 찌른다. 몸통을 통째로 던지듯이.
손목이 아니라……
어깨로.
서걱.
이번엔 깨끗했다. 칼날이 놈의 목 옆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놈이 쓰러졌다. 피는 보지 않았다. 다음 놈의 발만 봤다.
……된다.
세 번째, 네 번째. 칼끝이 점점 몸에 붙었다. 머릿속의 S급 검술과 손끝의 고블린 단검술이 조금씩 한쪽으로 겹쳐졌다. 매점 틈에서 나왔을 때 내 주위에 고블린 다섯이 쓰러져 있었다. 왼팔에서 피가 손끝까지 흘렀다. 근처 고블린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 싸움은 끝났다. 고블린 무리와의 싸움은. 몸이 그렇게 알려 줬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 같은 감각으로.
* * *
고개를 들어 그녀를 찾았다.
윤하는 시계탑 앞에 있었다. 그 뒤에 사람 넷이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엄마, 할머니 한 분, 겁에 질린 대학생 둘.
고블린 하나가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팟.
윤하가 찔렀다. 정확했다. 칼끝이 고블린의 목 옆을 정확히 노렸다. 그런데 약했다. 칼끝이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고블린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가 다시 덤볐다. 그녀가 다시 찔렀다. 같은 자리를. 세 번 만에 쓰러뜨렸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들렸다.
"입사 사흘째여도…… 협회 요원이야."
자기한테 하는 말이었다. 떨리는 칼을 다시 고쳐 쥐면서.
할머니가 그녀의 제복 자락을 잡아당겼다.
"아가씨도 얼른 도망가!"
"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그녀가 웃었다. 떨리는 입꼬리로. 할머니는 가지 않았다. 대학생 둘도 가지 않았다. 다리가 풀린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그걸 보고, 다시 앞을 봤다. 칼끝을 들어 올렸다. 자기 등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쿠웅.
땅이 울렸다. 광장 바닥이 흔들렸다.
균열에서 회색 다리가 하나 내려왔다. 그다음 몸통. 3미터가 넘는 거인이 통나무 같은 몽둥이를 끌며 걸어 나왔다. 생고기 썩는 냄새가 광장을 덮었다.
크오오오.
오우거였다.
놈이 고개를 돌렸다. 시계탑 쪽으로. 사람 다섯이 모여 있는 쪽으로.
윤하가 칼을 들었다. 들긴 들었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등 뒤에서 아이가 울었다.
나는 뛰었다. 맨발 하나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력은 0이었다. 단검은 녹슬었다.
멀다. 이 다리로는.
십 년 전에 다친 다리예요.
붕대 감은 무릎이 눈앞에 겹쳤다. 바로 저 자리에서, 바로 지금, 그 무릎이 부서진다.
오우거가 몽둥이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후우웅.
그녀의 머리 위로.
"윤하 씨!!"
이번엔 늦지 않는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