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3화 · 살아 있는 사람

후우웅.

몽둥이가 올라갔다. 그녀 머리 위로.

거리가 열 걸음. 레벨 1의 다리로는 닿지 않는다. 마력은 0. 손에 든 건 녹슨 단검 하나.

그런데 오우거는 내려치지 않았다. 아직.

오우거는 내려치기 전 반드시 한 번 숨을 들이켠다. 2초.

전생에 수십 마리를 잡으며 몸에 새긴 박자였다. 놈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하나.

손에 쥔 단검을 던졌다.

휙.

괴력도 없고 기술도 없는 팔이었다. 그래도 고블린의 단검술이 손끝을 이끌었다. 녹슨 칼이 허공을 돌며 날아가 오우거의 손목에 박혔다.

크앙.

몽둥이가 비틀렸다. 반 박자 늦었다. 둘.

그 반 박자 동안 마지막 세 걸음을 몸을 던져 메웠다. 그녀 허리를 끌어안았다. 둘이 엉켜 옆으로 굴렀다.

콰앙.

몽둥이가 바로 옆 바닥을 부쉈다. 보도블록 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중 큰 것 하나가 내 등과 어깨를 때렸다.

윽.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숨이 컥 막혔다. 등 한가운데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

그녀는 내 밑에 깔려 있었다. 내 팔 하나가 그녀 머리 뒤를 받치고 있었다. 제복 너머로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빠르게, 아주 빠르게. 내 것과 박자가 엉켰다.

얼음색 눈이 코앞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었다. 흙먼지 사이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십 년 동안 숙소 빨래 바구니에서 맡던 그 냄새였다.

"왜……."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왜, 저를?"

대답이 목에 걸렸다.

십 년을 같이 싸웠으니까.

……라고는 말할 수 없다.

2035년의 그녀가 겹쳐 보였다. 마지막 밤 모닥불 앞에서 무릎을 두드리며 웃던 얼굴. 십 년 전에 다친 다리예요, 하던 그 웃음. 그 다리가 지금 내 밑에서 멀쩡했다.

"뒤에 계세요."

그 말밖에 못 했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자기가 어떤 자세로 누워 있는지 깨달은 얼굴이었다. 하얗던 볼에 순식간에 핏기가 돌았다. 귀 끝부터 빨개졌다.

"네, 네. 뒤에. 뒤에 있을게요. 그, 손이."

말이 빨라졌다. 내 손이 아직 그녀 허리를 감고 있었다. 손을 빼자 그녀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숨이었다.

* * *

쿵, 쿵.

오우거가 손목의 단검을 뽑아 던졌다. 침 섞인 입김이 뜨거웠다. 놈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일어서는데 등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내 팔을 잡아 세웠다.

놈의 걸음을 봤다. 오른발, 그리고 왼발. 왼발을 디딜 때 몸이 아주 조금 기울었다.

왼쪽 다리를 끈다.

전생에 이놈을 잡은 건 협회 S급이었다. 늦게 도착해서, 그녀가 쓰러진 뒤에. 나는 그 장면을 협회 기록 영상으로 봤다. 수백 번. 그 S급의 첫 칼은 왼쪽 무릎이었다. 거기에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땅에 떨어진 고블린 단검 하나를 주웠다. 뛰어들었다.

탁.

몽둥이 밑으로 파고들어 왼쪽 무릎을 그었다.

팅.

튕겼다. 회색 가죽 위로 하얀 줄 하나만 남았다. 손목이 꺾일 뻔했다.

퍼억.

몽둥이 손잡이가 옆구리를 쳤다.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입 안에 흙과 피 맛이 섞였다.

가죽이 너무 두껍다. 고블린 칼로는 안 들어간다. 그런데 전생의 그 S급은 한 번에 갈랐다. 영상 속 장면을 떠올렸다. 그 칼이 들어간 순간, 오우거는 왼발을 막 디디고 있었다.

힘줄은 체중이 실린 순간에만 열린다.

왼발을 디디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놈의 눈이 나를 보고 있으면 안 된다.

"괜찮아요?! 피가……!"

그녀가 달려왔다.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이 피에 젖었다.

그녀를 봤다. 떨리는 칼을 쥔 손. 그런데 아까 고블린을 찌를 때, 칼끝은 매번 같은 자리에 들어갔다. 약했지만 정확했다.

"한 번만, 저놈 눈을 끌어 주세요."

"네?"

"발목을 찌르면 왼발을 내딛을 거예요."

그녀가 오우거를 봤다. 나를 봤다. 숨을 한 번 삼켰다.

"……한 번이면 돼요?"

"한 번이면 돼요."

* * *

그녀가 뛰었다.

팟.

은빛이 오우거의 오른쪽으로 파고들었다. 칼끝이 오른쪽 발목을 찔렀다. 깊지 않았다. 그래도 정확했다. 아킬레스건 바로 옆이었다.

오우거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봤다. 아픈 발을 들어 올리며 체중을 왼발로 옮겼다.

쿠웅.

왼발이 땅을 디뎠다. 무릎 뒤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아래로 힘줄이 불룩 솟았다.

지금.

놈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왼쪽 무릎 뒤, 솟은 힘줄 위로 칼을 그었다.

서걱.

이번엔 들어갔다. 손목까지 울리는 감각.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

쿠구궁.

오우거가 왼쪽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어깨가 내 키 높이까지 내려왔다.

어깨를 밟고 뛰었다. 하늘의 파란 균열이 눈앞에 가득 찼다.

푹.

목덜미에 칼을 내리꽂았다. 짧게, 깊게. 거인의 숨이 멎는 걸 손바닥으로 느꼈다.

쿠웅.

먼지가 피어올랐다. 거대한 몸이 광장에 엎어졌다. 나는 그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레벨 업】 【레벨 1 → 5】 【근력 8 → 14 / 민첩 9 → 13】 【레벨이 올라 마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몸 안으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등의 통증이 조금 무뎌졌다.

마력이 다시 찼다. 그렇다면.

고블린 무리와의 싸움은 끝났다. 이건 새 싸움이었다.

【알림】 【조건 충족 — 적을 쓰러뜨렸습니다】 【고유 스킬 '회수'를 쓸 수 있습니다】

"회수."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스킬 회수】 【'오우거의 괴력'을 회수했습니다】 【근력 14 → 21】 【주의 — 힘 조절이 서툽니다】

손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 마디마다 무언가 꽉 들어찼다.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손잡이를 쥐었다.

빠직.

손잡이가 손 안에서 으스러졌다. 나무 조각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서툴다는 게 이런 거였나.

레벨이 네 개나 뛰었다. 전생엔 레벨 5까지 석 달이 걸렸는데. 그 석 달 동안 나는 고블린 한 마리 잡는 데도 쩔쩔맸다.

* * *

오전 10시 12분. 게이트가 닫혔다.

삐뽀삐뽀. 사이렌이 몰려왔다. 구급차, 경찰차, 협회 마크를 단 검은 승합차. 부상자들이 들것에 실려 갔다.

시계탑 앞의 넷은 무사했다. 할머니가 윤하의 두 손을 잡았다.

"아가씨 덕에 살았어, 고마워."

"저는…… 아무것도……."

윤하가 말끝을 흐렸다. 할머니는 손을 놓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쓰다듬고 나서야 놓았다.

아이를 안은 엄마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품 안의 아이가 손을 뻗었다. 네 살쯤 됐을까. 작은 주먹 안에 딸기 맛 사탕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아저씨 이거."

"고마워."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대학생 하나가 휴대폰으로 오우거 시체를 찍다가, 옆에 있던 모르는 아주머니한테 등짝을 맞았다. 광장에 웃음 비슷한 게 번졌다. 다들 살아 있어서 할 수 있는 웃음이었다.

전생의 오늘, 이 넷은 이 자리에 없었다.

윤하가 내게 왔다.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제복 상의를 벗어 접었다. 그걸 내 등과 어깨 사이 상처에 대고 두 손으로 눌렀다. 체중을 실어서.

아팠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아 있다는 감각이 아픔보다 컸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 어깨를 누르는 압력이 파도처럼 들쭉날쭉했다.

"손이 계속 떨리네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더 세게 눌렀다. 떨림을 누르려는 것처럼.

"근데 아까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윤하 씨, 하고 외쳤던 걸 그녀는 듣고 있었다.

"……명찰이요."

그녀가 자기 가슴의 명찰을 내려다봤다.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묻지 않았다.

"F급 신입이에요. 오늘도 결국 아무것도 못 했어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버텼잖아요. 사람들 앞에서."

"네?"

"끝까지 안 비켰잖아요. 그리고 발목은 윤하 씨가 찔렀어요. 저 혼자였으면 지금 깔려 있어요."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작게, 참으려다 실패한 소리.

전생의 그녀는 오늘 무릎이 부서지고 등 뒤의 사람들을 잃었다. 지금의 그녀는 아무것도 못 했다며 울고 있었다. 그 차이를 그녀는 영영 모를 것이다. 그래도 됐다.

꼬르륵.

내 배에서 났다. 광장이 잠깐 조용했던 순간이었다.

"……아침 안 드셨죠."

그녀가 제복 바지 주머니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냈다. 체온에 반쯤 녹아 있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포장을 뜯었다. 녹은 초콜릿이 손가락에 묻었다. 단맛이 혀에 닿자 그제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그걸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수첩을 꺼냈다.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럼 확인할게요. 각성자시죠? 등록 번호는요? 협회 명부에 없는 얼굴이던데요."

"그냥 지나가던…… 백수요."

그녀가 나를 한참 봤다. 그러고는 수첩에 볼펜을 댔다. 직업 칸에, 또박또박.

직업: 백수.

그 두 글자를 써 놓고 그녀가 볼펜 끝을 깨물었다. 수첩과 나를 번갈아 봤다. 미등록 각성자. 보고해야 하는 사람. 그런데 방금 자기 목숨을 구한 사람.

입술이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서윤하! 보고 안 해?"

검은 승합차 쪽에서 피곤한 중년 목소리가 고함쳤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 사이 나는 일어섰다. 맨발 하나로 구경꾼 사이를 걸어 나갔다.

"잠깐만요! 백수 씨!"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쫓아오려면 수첩의 그 칸을 먼저 정해야 했으니까.

역 뒤편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온몸이 떨렸다. 이가 따닥 부딪혔다. 주머니에서 아이가 준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딸기 맛이 너무 달아서 눈물이 났다. 사탕 때문이라고 치기로 했다.

* * *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누가 나를 재고 있을 때 오는 감각이었다.

광장 건너편 빌딩 옥상에서 흰 옷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흰 정장, 뒤로 넘긴 회금발.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입 모양은 읽혔다. 십 년을 옆에서 본 입이었다.

재밌는 놈이 하나 있네.

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백건우.

건우 형, 하고 부르던 입이 굳었다. 등에서 칼이 빠져나가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손에 쥔 초코바 포장지가 괴력에 짓뭉개졌다.

이번 생엔 아무도 잃지 않는다.

그리고 너는, 내가 먼저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