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4화 · 계란 한 개

두근.

손바닥이 뛰었다. 심장이 아니라 손바닥이.

그날 밤, 고시원 옥상. 빨래 건조대와 고장 난 실외기 사이에 앉아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동전만 한 붉은 자국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맥박처럼 아주 느리게, 켜졌다 꺼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단검이 손목에 맞았고, 윤하가 발목을 찔렀고, 레벨이 오르며 마력이 찼다. 하나라도 어긋났으면 지금 나는 서울역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음에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다.

내 패를 알아야 한다.

* * *

시험 하나. 괴력.

편의점에서 산 생수병을 쥐었다. 살살, 아주 살살.

팡.

병이 터졌다. 물이 얼굴로 튀었다. 젖은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번엔 옥상 난간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정말 톡.

끼이익.

쇠 난간이 손가락 모양으로 휘었다. 아래층 누군가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숨을 죽였다. 창문이 다시 닫혔다.

……톡 쳤을 뿐인데.

전생에 아는 헌터 중에 근력형이 있었다. 각성 첫 주에 여자 친구 손을 잡았다가 손가락 두 개를 부러뜨렸다고 했다. 다들 그 얘기에 웃었다. 지금은 안 웃겼다.

힘을 넣는 것보다 빼는 게 더 어렵다. 특히 사람 손을 잡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시험 둘. 단검술.

부서진 손잡이 대신 수건을 감은 단검을 쥐었다. 천천히 그었다. 아주 천천히. 손목이 아니라 어깨로. 하나, 둘. 슥, 슥. 달빛 아래 칼끝이 은색 선을 그렸다.

쉰 번째쯤 손이 저절로 궤적을 고쳤다. 아흔 번째엔 손목에 힘이 빠지고 어깨만 남았다.

백 번째.

【스킬 정보】 【고블린의 단검술 Lv.1 → Lv.2】 【손에 익을수록 오른다】

쓸수록 오른다. 하루 천 번이면.

전생의 나는 '근성'이라는 스킬 하나로 10년을 버텼다. 그 스킬이 뭘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버티게 해 줬겠지. 그것 말고는.

시험 셋. 회수.

"하나만 묻자. 살아 있는 사람한테도 되나?"

창이 바로 떴다.

【안내】 【회수는 '쓰러뜨린 적'에게만 쓸 수 있습니다】 【동료·민간인에게는 쓸 수 없습니다】

……다행이네.

혹시 몰라서 물은 거였다. 만약 된다면, 나는 언젠가 그걸 쓰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백건우한테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그 생각이 무서웠다.

【안내】 【참고로】 【비둘기도 안 됩니다】

옥상 난간에 앉아 있던 비둘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안 해."

마지막. 몸.

옥상 끝에서 끝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타다닥. 세 번째 왕복에서 종아리가 꼬였다.

찌릿.

"윽……!"

바닥에 엎어졌다. 쥐가 났다. 종아리를 붙잡고 굴렀다. 콘크리트 바닥이 차가웠다.

민첩 13. 전생의 십 분의 일도 안 된다.

쥐가 풀릴 때까지 누워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전생 S급이 옥상에서 쥐가 나 뒹굴고 있었다. 셋이 봤으면 일주일은 놀렸을 것이다. 소율은 사진을 찍었을 거고, 예린은 걱정하는 척 웃었을 거고, 윤하는 말없이 종아리를 주물러 줬을 것이다. 세게.

누운 채로 하늘을 봤다. 서울 하늘에 별이 세 개 보였다. 2035년의 하늘엔 별이 없었다. 늘 붉었으니까.

* * *

밤 11시 40분. 공용 주방.

라면을 끓였다. 찌그러진 냄비에 물을 붓고, 면을 넣고, 스프를 넣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이 없었다. 내 칸에는 김치 반 통과 고추장 하나뿐이었다.

계란도 없다.

책상 위에는 낮에 받은 초코바 껍질이 놓여 있었다. 버리지 못하고 들고 왔다. 녹은 초콜릿 자국이 은박지 안쪽에 남아 있었다.

후루룩.

전생에도 라면을 자주 먹었다.

삼 년째 되던 겨울이었다. 무너진 상가의 편의점 안. 버너 하나에 냄비 하나. 넷이 둘러앉아 라면 다섯 개를 끓였다. 밖에서는 눈이 내렸고, 몬스터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대장은 꼭 면부터 먹더라."

소율이 젓가락으로 내 그릇을 가리켰다. 무슨 버릇이냐고 웃으면서.

"국물까지 다 마시면 죽는다, 진짜로."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국물을 다 마셨다.

냄비 안에 계란이 하나 있었다. 마지막 남은 계란이었다. 내가 젓가락을 대려는 순간 다른 젓가락이 그것을 집어 갔다.

"대장 계란은 제 거예요."

윤하였다. 반듯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무릎이 아파 걷지도 못하던 겨울이었는데, 계란 뺏는 손만은 빨랐다.

예린은 그걸 보고 웃었다. 떨리는 손으로 자기 그릇의 계란을 반 갈라 내 그릇에 넣어 줬다.

그날이 그해 겨울 처음으로 넷이 웃은 날이었다. 셋 다 이미 상처를 하나씩 안고 있던 겨울이었다. 그래도 웃었다. 계란 하나 때문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국물이 식어 가고 있었다.

이번엔, 계란 정도는 사 줄 수 있겠지.

쾅.

벽이 울렸다.

"이 시간에 라면 냄새! 나도 줘!!"

옆방 아저씨였다.

"계란 없어요."

"계란 없는 라면을 무슨 맛으로 먹어!"

그러게요. 속으로만 대답했다. 국물을 마셨다. 다는 아니고, 반만. 죽으면 안 되니까.

* * *

방에 돌아와 누웠다. 창이 떴다.

【숨겨진 퀘스트】 【차예린 — 남은 시간 6일】 【한소율 — 남은 시간 29일】

예린은 명동. 그 전에 레벨을 올려야 한다. 백야교의 사제는 B급 셋을 혼자 막은 놈이었다. 레벨 5로는 근처에도 못 간다.

머릿속에 목록을 펼쳤다. 전생 3년 차에 협회 기록실을 뒤지며 외운 것. 첫해에 열린 게이트들의 시간과 장소. 그중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가까운 것.

을지로 지하상가. 폐점 구역. 전생 기록 속의 날짜와 시간이 떠올랐다. 그곳이라면 레벨 5로도 해 볼 만했다. 해 볼 만해야 했다.

계획을 세우다 잠이 들었다. 꿈은 꾸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똑똑.

문을 열자 은빛 포니테일이 복도 형광등 아래 서 있었다. 검은 제복, 은색 테두리.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한국헌터협회 서윤하입니다."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제는…… 고마웠습니다."

"여길 어떻게 찾았어요?"

"CCTV랑, 이거요."

그녀가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 회색 삼선 슬리퍼 한 짝이 들어 있었다. 어제 광장 저편으로 날아간 그것. 먼지가 깨끗이 털려 있었다.

"광장에 이것만 남아 있었어요. CCTV로 이 슬리퍼 주인이 탄 지하철을 따라왔어요. 개찰구 뛰어넘은 것도 다 찍혔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방에 들였다. 들이고 나서야 문제를 알았다. 한 평 반이었다. 의자엔 빨래가 쌓여 있었고 바닥엔 컵라면 용기가 탑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방을 둘러봤다.

"앉을 데가 어디예요?"

"……침대요."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서, 서서 할게요."

문 앞에 섰다. 문을 닫으면 그녀 등이 문에 닿았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 그녀의 무릎이 내 무릎 바로 앞에 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였다.

그녀가 다른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우유 하나와 빵 두 개.

"초코바로는 부족했을 것 같아서요."

"……고마워요."

우유를 받았다. 차가웠다. 그녀가 내 손을 봤다. 손등의 긁힌 자국과 어깨의 핏자국 밴 셔츠를.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했다.

"어깨, 병원 가셨어요?"

"약국 거즈요."

"보여 주세요."

대답하기 전에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한 걸음이면 충분한 방이었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내 티셔츠 목둘레를 손가락으로 당겼다. 어깨의 거즈가 드러났다. 피가 배어 갈색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옆에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끝이 내 뺨을 간질였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그 숨이 목에 닿았다.

"……다음엔 병원 가세요. 이름 안 남기는 데로 제가 알아봐 드릴게요."

그녀가 셔츠 목둘레를 놓았다. 놓고 나서야 자기가 어디까지 다가와 있었는지 안 얼굴이었다. 얼른 문 앞으로 물러섰다. 등이 문에 쿵 부딪혔다.

"보고서, 아직 못 냈어요."

그녀가 수첩을 꺼냈다. 어제 그 수첩이었다.

"직업 칸에 '백수'라고는 도저히 못 쓰겠어서."

"그냥 쓰세요. 사실인데."

그녀가 수첩을 덮었다. 표정이 반듯해졌다. 일하는 사람의 얼굴로.

"등록하세요. 미등록 각성자가 게이트에서 싸우면 불법이에요."

"등록은 못 해요."

"왜요?"

등록하면 이름이 남는다. 그놈 눈에도.

어제 옥상에서 그 금색 눈이 나를 봤다. 얼굴은 봤어도 이름은 아직 모른다. 전생에 협회 명부는 백광으로 줄줄 샜다. 이름까지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이유는 말 못 해요. 대신 거래하죠."

"거래요?"

"앞으로 열릴 게이트를 알려 줄게요. 윤하 씨는 협회 안 소식을 주고요."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웃으니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풀렸다.

"게이트가 언제 열릴지 아는 사람은 없어요. 협회 탐지기로도 열리기 직전에야 겨우 잡혀요."

"오늘 밤 열 시. 을지로 지하상가."

그녀의 웃음이 멈췄다.

"……틀리면요?"

"그때 등록할게요. 윤하 씨 앞에서."

그녀가 나를 한참 봤다. 얼음색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거짓말을 찾는 눈이었다. 못 찾은 모양이었다.

"……확인만 할 거예요. 확인만."

쾅.

벽이 울렸다.

"연애는 밖에서 해!!"

"연애 아니고요! 공무 중이고요!"

그녀가 벽에 대고 외쳤다. 말이 빨라졌다. 얼굴이 귀까지 빨갰다.

"저 가 볼게요!"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가 문틈으로 고개만 내밀었다.

"우유는 오늘 안에 드세요. 유통기한 오늘까지예요."

문이 닫혔다. 복도에서 그녀의 구두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계단에서 한 번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하고 혼잣말하는 소리도.

* * *

창가에 섰다. 공책만 한 창 너머로 그녀가 고시원 앞 골목을 걸어가는 게 보였다. 걸으면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다. 그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오늘 밤 10시, 을지로. 틀리면 바로 보고.

……맞으면?

그녀는 그 다음 줄을 비워 뒀다고 했다.

전생에 그 게이트는 사흘 뒤 터졌다. 아무도 몰랐던 숨은 게이트. 지하상가 계단에서 자던 사람들과 야간 경비원들. 서른두 명이 죽었다.

우유를 땄다.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오늘 밤, 혼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