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5화 · 그림자 걸음

밤 9시 55분. 을지로 지하상가.

셔터가 반쯤 내려앉은 통로는 습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똑, 똑. 문 닫은 가게 유리문마다 '임대'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곰팡이 냄새가 진하게 고였다.

폐점 구역 맨 안쪽. 셔터 두 개 사이의 좁은 틈에 그것이 있었다.

바닥에서 한 뼘 떠 있는 검은 물웅덩이.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가장자리가 숨 쉬듯 일렁였다.

있다.

【알림】 【E급 게이트를 발견했습니다】 【범람까지 69시간】

전생에 이 게이트는 사흘 뒤에 터졌다. 지하상가 계단에서 자던 사람들과 야간 경비원들. 서른두 명.

그때 나는 뉴스로 봤다. 고시원 방에서, 컵라면을 먹으면서. 화면 속 들것의 숫자를 세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서른둘. 그 숫자를 십 년 동안 잊지 못했다.

E급. 지금 레벨로도 된다. 되어야 했다.

편의점에서 산 것들을 점검했다. 보조 배터리, 생수, 초코바 두 개. 수건을 감은 단검. 휴대폰 배터리 94퍼센트.

협회에 알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정식 팀이 들어가고 내 이름은 끝까지 숨는다. 하지만 전생의 협회는 이 게이트를 사흘 동안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레벨이 필요했다. 예린에게 남은 시간은 엿새도 안 됐다.

변명이었다. 사실은 그냥 무서웠다. 누군가에게 맡겼다가 또 늦을까 봐.

숨을 한 번 고르고, 손을 넣었다. 손목이 얼음물에 잠긴 것처럼 차가워졌다.

들어갔다.

* * *

안은 또 하나의 지하상가였다.

똑같이 생긴 통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셔터 내린 가게들, 꺼진 간판들. 그런데 천장의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하얗게, 지지직거리면서.

팟. 팟. 팟.

뚝.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 짧은 어둠 사이로 빨간 점들이 보였다. 통로 저편에.

둘, 넷, 여덟.

눈이었다.

다시 불이 켜지자 그것들이 보였다. 송아지만 한 검은 개들. 털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흩어졌다. 그림자 사냥개.

놈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불이 켜져 있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뚝.

불이 꺼졌다.

으르릉.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덮쳐 왔다. 몸을 틀며 단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무언가를 갈랐다. 그런데 손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 솜이불을 가른 것 같았다.

팟.

불이 켜졌다. 내 앞에 사냥개가 있었다. 단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연기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고 있었다.

뚝.

쾅.

벽에 처박혔다. 왼팔에 이빨이 박혔다. 뜨거웠다.

"크윽……!"

괴력으로 놈의 턱을 비틀어 떼어 냈다. 개가 바닥을 굴렀다. 팔에서 피가 쏟아졌다.

기둥 뒤로 굴러 들어갔다. 등을 기둥에 붙였다. 숨을 몰아쉬었다.

베어도 흩어진다. 그냥 휘두르면 체력만 빠진다.

전생에 이 게이트에 들어간 C급 헌터의 보고서는 몇 줄뿐이었다. 칼이 잘 안 먹힌다. 우두머리가 있다. 그리고 동료 둘을 잃었다. 나머지는 직접 알아내야 했다.

* * *

기둥 너머를 봤다. 숨을 죽이고.

팟. 팟. 팟. 뚝.

불이 켜져 있는 동안 놈들은 정말로 움직이지 않았다. 동상처럼. 빨간 눈만 나를 쫓았다.

불이 켜진 동안, 놈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박자를 셌다. 팟, 팟, 팟. 뚝. 다시 팟, 팟, 팟. 뚝.

켜짐 셋, 꺼짐 하나.

그 하나 동안만 놈들이 움직인다. 반 초쯤.

그리고 하나 더 봤다. 꺼지는 순간 덮쳐 올 때, 놈들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순간 목 아래, 가슴뼈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붉은 것이 번쩍였다. 엄지손톱만 한 붉은 구슬. 연기 같은 털이 그 자리만 비켜 있었다.

물려고 입을 벌릴 때만 목 아래 핵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휘두를 필요가 없다. 꺼지기 직전, 칼을 그 자리에 두고 기다린다. 놈이 스스로 칼에 와서 박히게.

기둥 뒤에서 나왔다. 사냥개 하나 앞에 섰다. 단검을 놈의 목 높이에 내밀었다. 그대로 멈췄다.

무서웠다. 불이 꺼지면 놈이 덮친다. 내 칼이 반 뼘만 어긋나도 이빨이 내 목에 박힌다.

팟.

하나.

팟.

둘.

팟.

셋.

뚝.

어둠 속에서 놈이 덮쳤다. 칼에 묵직한 것이 걸렸다. 딱딱한 구슬이 깨지는 감각.

퍽. 파삭.

불이 켜졌다. 내 칼끝에서 사냥개가 연기로 풀려 흩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다시 뭉치지 않았다.

됐다.

그다음부터는 박자였다. 셋을 세고, 칼을 두고, 기다린다. 왼팔이 욱신거렸다. 숨이 목에 걸려 쇳소리를 냈다. 일곱 번째 놈 때 박자를 놓쳐 어깨를 물렸다. 여덟 번째에 다시 맞췄다.

여덟 마리가 흩어졌을 때 무릎이 꺾였다. 초코바 하나를 뜯었다. 손이 떨려서 포장지가 잘 안 뜯어졌다. 단맛이 혀에 닿자 조금 살 것 같았다.

회수는 쓰지 않았다. 한 싸움에 한 번. 졸개들에게 쓸 순 없었다. 이 게이트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 * *

통로 끝, 형광등이 모두 꺼진 구역이 있었다.

우두머리.

다른 개들의 두 배는 되는 그림자가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빨간 눈이 넷. 연기 같은 털이 몸 주위에서 소용돌이쳤다.

놈이 나를 봤다. 그리고 바닥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사라졌다.

"어디……."

목덜미가 서늘했다.

뒤였다. 내 등 뒤 그림자에서 놈이 솟구쳤다. 몸을 틀었다. 늦었다. 거대한 몸통이 나를 들이받았다.

벽에 처박혔다. 셔터가 찌그러지는 소리. 숨이 막혔다. 눈앞에 별이 튀었다.

놈이 다시 그림자로 가라앉았다. 이번엔 기둥 그림자에서 나왔다. 그다음엔 셔터 아래 그림자에서.

박자가 안 통한다. 이놈은 그림자를 타고 다닌다. 형광등도 이 구역엔 없었다.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 6년 차, 그림자 계열 B급 게이트를 공략하던 날. 그날 윤하가 말했다. 이런 놈들은 그림자가 집이에요. 빛을 비추면 집을 잃어요.

빛을 비추면 실체가 드러난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려서 잠금 화면이 두 번 안 풀렸다. 세 번째에 플래시를 켰다.

하얀 빛이 통로를 갈랐다.

빛이 닿은 셔터 아래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우두머리가 빛에 끌려 나왔다. 연기가 털이 되고, 털 밑에 뼈와 살이 생겼다. 놈이 다른 그림자로 도망치려 했다. 빛을 따라 비췄다. 놈이 갈 그림자가 없었다.

빛 아래 갇힌 놈이 입을 벌렸다. 목 아래 붉은 핵이 번쩍였다. 일반 개보다 주먹 하나만큼 컸다.

왼손에 빛을, 오른손에 칼을.

찔렀다. 괴력을 실어서.

쩍.

거대한 몸이 바닥을 굴렀다. 빨간 눈 넷이 차례로 꺼졌다.

휴대폰 플래시에 목숨을 빚졌다. 배터리가 61퍼센트였다.

* * *

【레벨 업】 【레벨 5 → 9】 【마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몸 안으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물린 팔의 통증이 조금 무뎌졌다.

【알림】 【조건 충족 — 우두머리를 쓰러뜨렸습니다】 【고유 스킬 '회수'를 쓸 수 있습니다】

쓰러진 놈의 몸이 천천히 연기로 풀려 가고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회수."

눈이 뜨거워졌다. 연기 한 줄기가 내 발밑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발바닥이 차가워졌다.

【스킬 회수】 【'그림자 걸음'을 회수했습니다】 【마력 → 0】

【스킬 정보】 【그림자 걸음 / 등급 E】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10m 안의 다른 그림자로 나온다】 【빛 아래에서는 쓸 수 없음】 【대가 — 마력 소모 큼】

어디 한번.

오른쪽 셔터 아래 그림자를 봤다. 발밑 그림자에 한 발을 디뎠다.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다. 운동화 밑창이 그냥 바닥을 디뎠다.

【알림】 【마력이 부족합니다】 【방금 다 쓰셨습니다】

"……알아. 알고 있어."

바닥에 드러누웠다. 온몸이 쑤셨다. 천장의 어둠을 보며 한참 웃었다. 미친놈처럼.

통로가 흔들렸다. 게이트가 닫히고 있었다.

* * *

밤 11시 7분.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맨 위, 기둥에 누가 기대 있었다.

은빛 포니테일. 검은 제복.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자 가면 어떡해요?"

"따라왔어요?!"

그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검은 기계. 액정에 숫자가 떠 있었다.

"탐지기, 몰래 빌려 왔어요. 반출 기록 남으면 저 시말서예요."

그녀가 액정을 내 쪽으로 돌렸다.

"10시 2분, E급 반응."

반응이 떴다가 11시 4분에 꺼진 기록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핵을 깬 시각이었다.

"……맞았네요. 진짜로."

목소리가 작았다. 반쯤은 놀람이고, 반쯤은 무서움이었다. 게이트를 미리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야 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왼팔에 멈췄다. 찢어진 소매 사이로 피가 굳어 있었다.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와 내 손목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괴력이 있는 손이라 나는 함부로 빼지도 못했다. 그녀가 다칠까 봐.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하늘색 바탕에 작은 흰 꽃무늬. 상처 위를 감고 매듭을 지었다. 고개를 숙이자 정수리가 내 턱 바로 밑에 왔다. 머리카락에서 밤공기 냄새가 났다.

"다음엔 저도 데려가요."

"F급이잖아요."

"그러니까 배워야죠."

그녀가 매듭을 꽉 당겼다. 아팠다.

전생에도 이렇게 묶어 줬었지.

3년 차, 첫 B급 게이트 앞에서. 다리를 절면서 내 팔을 붙잡고, 똑같이 매듭을 세게 당겼다. 그때도 같은 말을 했다. 다음엔 저도 데려가요. 그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 볼게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얼음색 눈동자 안에서 흔들렸다. 손을 놓지 않았다. 엄지가 내 손목 맥 짚는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 손수건, 빨아서 돌려주세요."

"얼마짜리인데요."

"삼천 원이요. 엄마가 사 준 거예요."

"백수한테는 큰돈이네요."

그녀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참는 데 실패했다. 짧은 웃음소리가 빈 지하상가 계단에 울렸다. 전생에 이 사람의 웃음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 * *

역까지 걸어가는 길. 창이 떴다.

【숨겨진 퀘스트】 【차예린 — 남은 시간 5일】

편의점 앞을 지나는데 유리창 너머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명동 일대 실종 신고 잇따라.]

화면에 명동 골목 CCTV가 비쳤다. 흐릿한 배경 한구석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흰 사제복. 한쪽으로 묶어 늘어뜨린 긴 은회색 머리. 목에 감긴 흰 뱀 문양.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입 모양이 보였다. 천천히, 한 글자씩.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