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데려와.
그 목소리가 밤새 귓가에 남았다. 바닥에 누워 손바닥을 봤다. 예린이 고친 손바닥은 매끈했다. 붉은 자국만 그대로였다. 불덩이를 쥐었던 감각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접시만 한 방패로는 오래 못 버틴다. 다음에 마광철이 오면, 그때는 할머니 여섯의 휴대폰도 없을 것이다.
불을 막을 피부가 필요하다.
* * *
다음 날 아침. 고시원 옥상.
넷이 빨래 건조대 사이에 둘러앉았다. 예린이 은박지에 싼 김밥을 펼쳤다. 윤하는 붕대 감은 팔로 협회 지도를 펼쳤다. 소율은 실외기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지도의 한 점을 짚었다.
"2호선 폐역. C급 게이트. 철갑 지네가 나와요."
"C급이요?"
윤하가 지도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제 E급이 된 사람이었다.
"놈들한테 '경화'가 있어요. 피부를 단단하게 하는."
그을린 점퍼 소매를 걷어 손바닥을 보여 줬다. 셋이 동시에 어제를 떠올리는 얼굴이 됐다.
"우두머리를 잡으면 그걸 가져올 수 있어요. 그럼 다음엔 불을 손으로 안 받아도 돼요."
소율이 실외기 위에서 다리를 멈췄다.
"근데 왜 당신이 대장인데요?"
"대장 아니에요."
"지금 작전 짜고 있잖아요. 지도 짚고. 대장처럼."
윤하가 김밥을 집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대장?"
몸이 굳었다.
그 말투였다. 2035년 옥상, 붕대 감은 무릎을 두드리며. 대장, 내일 아침엔 제가 앞에 설게요.
윤하가 김밥을 입에 넣다 말고 멈췄다.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장, 내일은 제가 앞에 설게요."
또.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그녀가 입을 막았다. 얼음색 눈이 동그래졌다.
"어, 왜 그 말이 나왔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율이 실외기 위에서 윤하를 봤다. 고양이 같은 눈이 가늘어졌다. 꿈 얘기를 하던 그 눈이었다.
예린이 김밥 한 줄을 들어 내 입 앞에 내밀었다.
"자, 대장님. 먹고 가요."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 웃음이 굳은 공기를 풀었다. 김밥을 받아 물었다. 간이 맞았다. 처음으로.
휴대폰이 울렸다. 오 팀장이었다.
"서윤하한테 들었다. C급이라고? 미쳤냐."
"네."
긴 한숨.
"임시 파티 허가. 협회 기록엔 '현장 조사'로 올린다. 사고 치면 내 이름은 빼라."
전화가 끊겼다.
넷이서 들어가는 첫 게이트.
전생엔 3년이 걸렸다. 이번엔 보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예린이 셋의 손에 김밥을 한 줄씩 더 쥐여 줬다. 소율이 그걸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윤하는 붕대 감은 팔로 받다가 떨어뜨릴 뻔했다. 내가 받아 줬다. 그녀가 고맙다고 하며 내 손등을 한 번 톡 쳤다.
* * *
4월 26일 오전 11시. 2호선 폐역.
30년 전에 막아 버린 구간이었다. 공사 가림막 안쪽의 철계단을 내려가자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계단 끝은 시멘트로 막혀 있었다. 그 옆으로 비상 통로가 하나.
비상 통로를 지나자 옛 승강장이 나왔다. 개찰구 위에 먼지가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벽에 색 바랜 광고판. 천장에서 녹물이 떨어졌다. 쇠 냄새와 곰팡이 냄새, 그 밑에 무언가 기어다니는 냄새.
선로 너머 터널 입구에 파란 균열이 일렁였다.
【알림】 【C급 게이트에 진입합니다】 【파티 — 강이현 · 서윤하 · 차예린 · 한소율】
파티. 창에 네 이름이 나란히 떴다. 가운뎃점으로 이어진 네 이름. 전생의 기록자는 이 창을 한 번도 띄운 적이 없었다. 전생엔 이 창이 없었으니까.
선로 쪽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천 개의 다리가 철로를 긁는 소리.
* * *
첫 시도는 엉망이었다.
철갑 지네 떼가 선로를 따라 쏟아져 나왔다. 사람 키만 한 것들. 몸마디마다 검은 쇠 같은 껍데기.
윤하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너무 빨리. 혼자서.
소율이 뒤에서 번개를 쐈다. 손끝으로, 조금씩. 그런데 번개가 지네가 아니라 윤하 옆의 레일로 휘었다. 파지직. 레일을 타고 번개가 튀었다. 윤하의 발밑에서 불꽃이 터졌다.
"앗……!"
윤하가 비틀거렸다. 그 틈에 지네 하나가 그녀의 다리를 휘감았다. 몸통이 조여 왔다.
예린이 뛰었다. 승강장 끝에서.
"너무 멀어요!"
치유가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선로로 뛰어내렸다. 그림자 걸음은 아꼈다. 장검으로 윤하를 휘감은 지네의 마디 사이를 그었다.
서걱.
"후퇴!"
윤하를 들쳐 안고 승강장 위로 올라갔다. 소율과 예린이 따라왔다. 넷이 개찰구 뒤로 몸을 숨겼다. 헐떡이며.
윤하의 종아리에 지네 다리 자국이 붉게 패어 있었다. 예린이 곧장 금빛을 피웠다.
"……미안."
소율이 개찰구에 기대 주저앉았다. 자기 손끝을 노려봤다.
"번개가 멋대로 휘었어."
* * *
개찰구 너머로 선로를 봤다. 숨을 고르며.
지네 떼가 우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놈들은 눈이 없었다. 더듬이만 휘저었다. 천장에서 녹물이 떨어지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똑. 녹물이 레일에 떨어질 때마다.
진동을 따라온다.
윤하가 처음 뛰어나갔을 때 놈들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몰린 이유였다. 그녀의 발소리.
그리고 번개는 금속에 끌린다.
측정회장에서 봤다. 금속 기둥으로 휘던 번개. 오늘 레일로 휜 번개. 소율의 탓이 아니었다. 번개의 성질이었다. 그렇다면 레일은 길이 된다. 지네들은 레일 위에 있었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2035년의 네 사람이 서던 자리. 윤하가 앞, 예린이 그 뒤, 소율이 멀리, 나는 옆.
"윤하 씨는 앞에서 발을 굴려 끌어요."
윤하가 붕대 감은 다리를 짚고 나를 봤다.
"소율 씨는 레일에 조금씩 흘려요. 지네 말고 레일에."
소율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이해한 얼굴이 됐다.
"예린 씨는 윤하 씨 뒤 두 걸음. 그 거리면 닿아요."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머리를 칩니다."
셋이 나를 봤다. 아무도 왜냐고 묻지 않았다. 어떻게 아느냐고도.
예린이 손뼉을 짝 쳤다.
"대장님 말 들어요, 다들."
윤하와 소율이 동시에 예린을 봤다.
"대장님?"
"대장님?"
예린이 웃기만 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져서 선로 쪽을 봤다.
* * *
두 번째.
윤하가 승강장 끝에 섰다. 숨을 내쉬었다. 발을 굴렀다.
쿵.
"이쪽이야!"
지네 떼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레일을 따라 그녀에게 몰려왔다.
그녀 뒤 두 걸음에 예린이 섰다. 손바닥을 펴고. 금빛이 언제든 피어날 수 있게.
선로 저편 승강장에서 소율이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을 레일에 댔다.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조금씩."
손끝에서 보랏빛이 레일로 흘러 들어갔다. 실처럼 가늘게. 번개가 레일을 타고 번졌다. 지네 떼가 깔고 있는 레일 전체로. 파지지직. 지네들이 경련하며 멈췄다. 껍데기 틈으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리 전체가 묶였다.
그때 터널 깊은 곳에서 그것이 나왔다.
여왕 지네. 터널을 꽉 채울 만큼 컸다. 몸마디 하나가 자동차만 했다. 껍데기가 강철처럼 번들거렸다. 레일의 번개가 그 껍데기에 닿자 튕겨 나갔다.
놈이 윤하를 향해 돌진했다. 진동을 따라. 레일을 짓뭉개며.
터널 천장의 그림자를 봤다. 놈의 머리 위로 이어진 그림자.
들어가.
차가운 물에 빠지는 감각. 터널 천장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여왕 지네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봤다.
머리 뒤, 붉은 마디.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 그곳만 껍데기가 붉었다. 숨 쉴 때마다 벌어졌다 닫혔다.
단월.
보랏빛 초승달이 칼끝에서 떨어져 나갔다. 붉은 마디 한가운데로.
콰직.
여왕 지네의 몸이 경련했다. 수천 개의 다리가 한꺼번에 레일을 긁었다. 윤하의 코앞에서 멈췄다. 거대한 머리가 승강장 끝에 쿵 떨어졌다. 윤하가 칼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 * *
【레벨 업】 【레벨 17 → 19】 【마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알림】 【조건 충족 — 적을 쓰러뜨렸습니다】 【고유 스킬 '회수'를 쓸 수 있습니다】
"회수."
여왕 지네의 강철 껍데기에서 은빛 한 줄기가 빠져나왔다. 내 팔을 타고 스며들었다. 피부 아래가 잠깐 딱딱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스킬 회수】 【철갑 지네의 '경화'를 회수했습니다】 【마력 → 0】
【스킬 정보】 【경화 / 등급 C】 【피부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한다】 【유지 중엔 움직임이 느려진다】
남은 실낱만 한 마력으로 팔에 힘을 줘 봤다. 팔뚝 피부가 회색으로 변했다. 손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이 둔했다. 기름 안 친 기계처럼.
예린이 다가와 내 팔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딱딱해요."
소율이 선로에서 올라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머리도 단단해져요?"
윤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붕대 감은 팔로 배를 잡고. 예린이 따라 웃었다. 소율은 진지하게 물은 거라며 화를 내다가 결국 웃었다.
나도 웃었다. 소리 내서.
전생엔 셋이 하나씩 상처를 안고 모였다. 처음 넷이 된 날, 아무도 웃지 못했다.
이번엔, 넷이서 웃는다.
* * *
게이트의 핵을 찾아 터널 안쪽으로 들어갔다. 전생 기록대로라면 터널 300미터 지점, 옛 신호실 안에 있었다.
신호실은 있었다. 핵도 있었다. 파란 수정이 녹슨 신호 장치 위에서 빛났다. 윤하가 칼 손잡이로 깨뜨렸다. 게이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터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호실 너머, 손전등 빛이 닿는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쇠문이었다. 높이가 터널 천장까지 닿았다. 문 표면에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이 맥박 치듯 희미하게 빛났다. 뿔 여러 개가 둘러싼 모양이었다.
손바닥이 뛰었다. 두근. 붉은 자국이 문양과 같은 박자로.
이 문양을 안다. 2035년 붉은 하늘에서 내려오던, 검은 뿔로 엮은 왕관.
【경고】 【기록에 없는 구조물입니다】
이 게이트의 보고서를 전생에 열 번도 넘게 읽었다. 신호실, 핵, 그리고 막다른 벽. 그게 전부였다. 이 게이트는 내가 건드린 적이 없었다. 백건우도, 마광철도 여기 오지 않았다. 나 때문에 바뀔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이런 문은…… 전생에 없었다.
셋이 내 뒤에서 숨을 죽였다. 소율이 내 소매를 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지직거렸다.
쇠문 너머에서 무언가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느리게. 아주 깊게.
미래가, 어긋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