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19화 · 불을 쥐다

"거절은 안 받는데."

"그 사람, 싫다잖아요."

내 등 뒤에서 소율의 손끝이 지직거렸다. 보랏빛이 내 점퍼 등판을 비췄다. 그녀의 숨이 얕고 빨랐다. 목에 걸리는 소리.

마광철이 나를 내려다봤다. 머리 하나 반이 컸다. 숨에서 탄내가 났다.

"넌 뭐야."

"환자요."

그가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쪽이었다. 눈썹이 반만 움직였다.

"환자가 왜 일어서."

열하루 전 이 진료소에서 예린이 하진에게 한 말이었다. 환자요, 아직 진료 중이라. 그때 그녀가 내 앞을 막아섰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경고】 【대상 — 마광철 / 레벨 43】 【레벨 차이 26】 【회수 가능 범위 안】

백건우 때는 측정 불가였다. 이놈은 닿는다. 서른이 안 된다.

닿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레벨 17로 43을 쓰러뜨려야 회수가 된다. 쓰러뜨릴 수 없다. 지금은. 등 뒤에 할머니 여섯과 예린과, 터지기 직전인 소율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소율 씨. 숨."

등 뒤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하나, 둘……"

전생 2031년이 떠올랐다. 예린의 치유소가 불탄 밤. 불길 속에서 그녀는 환자 열둘을 업어 날랐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한 명을 업고 나오다 무너진 들보에 등을 데었다. 그 뒤로 그녀는 등이 드러나는 옷을 입지 못했다. 그 불을 지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백광 27층 사무실에 있었다. 소식을 듣고도 길드장의 지시를 기다렸다.

* * *

마광철이 웃었다. 일그러진 얼굴 절반이 같이 웃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손끝에서 불덩이가 피어올랐다. 주먹만 한 것. 붉다가 하얗게 달아올랐다.

그가 나를 보지 않았다. 대기실 구석의 벤치를 봤다. 할머니들이 웅크려 앉아 있는 그 벤치.

불덩이가 날아갔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벤치 앞으로 한 걸음. 손을 뻗었다. 맨손으로.

성흔 방벽.

손바닥 앞에 흰 육각이 떴다. 접시만 한. 불덩이가 그 위에 꽂혔다. 육각이 휘었다. 열기가 육각 가장자리로 넘쳐 손등을 태웠다.

하나.

육각을 손바닥 쪽으로 끌어당겼다. 육각이 불덩이를 감싸듯 휘어졌다.

둘.

주먹을 쥐었다. 괴력으로. 육각이 불을 안으로 짓눌렀다. 불이 숨 쉴 공간이 없었다.

셋.

육각이 터졌다. 그 안의 불도 같이 꺼졌다. 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주먹 사이로 검은 연기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

주먹을 폈다. 손바닥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물집이 잡혔다. 손바닥 한가운데 붉은 자국만 멀쩡했다.

접시만 한 방패도 쓸 데가 있네.

할머니들이 내 등 뒤에서 숨을 멈췄다. 그러다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저 총각 손. 그 소리가 이상하게 힘이 됐다.

마광철이 자기 빈손을 봤다. 내 손바닥을 봤다. 웃음이 사라졌다가, 더 크게 돌아왔다.

"……재밌네."

* * *

그가 주먹을 쥐었다. 주먹 전체가 불에 휩싸였다. 한 걸음에 거리를 좁혔다. 불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장검을 칼집째 들어 막았다.

쾅.

몸이 밀려났다. 운동화 밑창이 리놀륨 바닥을 긁었다. 바닥이 그을리며 검은 줄 두 개가 그어졌다. 칼집이 뜨거워졌다. 손바닥의 물집이 터졌다.

괴력을 다 실었다. 그래도 밀렸다. 레벨 26 차이. 힘으로는 안 된다.

등 뒤에서 소율의 속삭임이 흔들렸다.

"하나, 둘…… 둘……"

둘에서 멈췄다. 셋이 안 나왔다. 그녀의 손끝에서 보랏빛이 커졌다. 진료소 형광등이 지직거렸다.

마광철의 두 번째 주먹이 왔다. 칼집으로 받으며 소리 내어 셌다.

"……셋."

밀렸다. 바닥에 검은 줄이 늘었다.

"소율 씨, 넷."

등 뒤에서 그녀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넷. 다섯은 그녀가 셌다. 형광등의 지직거림이 잦아들었다.

팔이 저렸다. 칼집 안에서 장검이 울었다. 단월을 쓸 수 있었다. 이 거리면 한 번은 들어간다.

여기서 단월을 쓰면 성당이 탄다.

초승달이 그를 가르면, 그의 불이 사방으로 튄다. 진료소 천장은 나무였다. 위층은 성당이었다. 할머니들이 웅크린 벤치는 원목이었다.

뒤에서 따뜻한 손이 내 등을 짚었다. 예린이었다. 금빛이 등을 타고 팔로 흘렀다. 터진 물집이 아물었다. 손등의 화상이 식었다.

"계속 막으세요. 제가 계속 고칠게요."

다정한 목소리였다. 떨리지 않았다.

그녀의 다른 손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침에 윤하가 쥐여 준 협회 호루라기였다. 그녀가 그걸 입에 물고 힘껏 불었다. 삐이익. 지하 진료소가 쩌렁쩌렁 울렸다. 마광철이 귀를 찡그렸다.

할머니 하나가 그 틈에 벤치 밑으로 기어가 휴대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눌렀다. 아무도 그걸 보지 않았다. 마광철도.

* * *

계단 위에서 문이 쾅 열렸다.

"한국헌터협회 E급 요원 서윤하입니다."

윤하였다. 제복 차림, 붕대 감은 왼팔. 오른손에 협회 신분증을 들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예린이 아침에 받은 호루라기를 불었을 것이다. 아니면 할머니 중 누가 문자를 보냈거나.

"민간 시설 안 스킬 사용은 위법입니다."

마광철이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붕대 감은 팔, E급 배지.

"E급이?"

코웃음이었다. 그런데 윤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왔다. 왼손에 든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화면에 통화 중 표시가 떠 있었다. 스피커가 켜져 있었다.

"지금 통화 중이에요."

휴대폰 너머에서 피곤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진료소에 울렸다.

"마광철 씨. 영상도 찍히고 있다."

오 팀장이었다.

대기실 벤치에서 할머니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손에 낡은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이 마광철을 향해 있었다. 녹화 중의 빨간 점이 깜빡였다.

"다 찍었어!"

다른 할머니들도 하나둘 휴대폰을 들었다. 손주가 사 준 휴대폰들이었다. 여섯 개의 화면이 마광철을 향했다.

마광철의 얼굴이 굳었다. 화상 흉터가 꿈틀했다. 그가 불 주먹을 내렸다.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불이 꺼졌다. 진료소 공기가 한꺼번에 식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이름."

"강이현."

그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 씹듯이.

"기억해 두지."

돌아서 계단을 올라갔다. 윤하 옆을 지나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윤하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계단 끝에서 그가 멈췄다.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다음엔 태워 주지."

* * *

"총각, 손! 손 좀 봐!"

할머니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예린이 내 손을 붙잡았다. 금빛이 손바닥을 덮었다. 아까보다 진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또 다치셨네요. 이번엔 저 때문에."

"예린 씨 때문 아니에요. 저놈 때문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금빛이 계속 흘렀다. 손바닥이 다 나았는데도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 다 나은 손바닥을 자기 뺨에 댔다. 아직 열이 남은 손이었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아까 등 뒤에서 이현 씨 손 고칠 때요. 이 손이 계속 다시 타는 거예요. 고치면 타고, 고치면 타고. 근데 이현 씨는 한 번도 안 물러섰어요."

그녀가 눈을 떴다.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소율이 벤치 끝에 앉아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끝이 조용했다.

"……안 터졌어요."

"잘했어요."

그녀가 나를 봤다. 고양이 같은 눈이 흔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다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갰다.

"넷, 다섯은 내가 셌어요. 당신이 넷까지 세서."

"알아요."

"……셋까지만 세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길게 세야 했어요."

윤하가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섰다. 붕대 감은 팔로 팔짱을 끼려다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현 씨,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요."

그녀가 붕대 감은 팔로 내 점퍼 소매를 붙잡았다. 그을린 소매였다. 손가락이 탄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얼마나 뜨거웠는지 재 보는 것처럼. 그녀의 손이 떨렸다. 시험장에서도 안 떨던 손이었다.

"혼자 안 했어요. 예린 씨가 고쳐 주고, 소율 씨가 참고, 윤하 씨가 끊어 주고. 할머니들이 찍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반박할 말이 없는 얼굴이었다.

예린이 내 손을 놓았다. 놓고 나서 앞치마에 손을 문질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저…… 이현 씨 쪽에 설게요. 백광 말고."

소율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나도. 떡볶이 때문에."

윤하가 둘을 봤다. 나를 봤다. 헛기침을 했다.

"저는 감시니까 당연히."

셋이 나를 봤다.

넷.

2035년 옥상의 넷. 마지막 방어선의 넷. 그 넷이 보름도 안 돼서, 처음 보는 얼굴로, 이 지하 진료소에서 다시 넷이 됐다.

목이 막혔다. 할머니 하나가 내 등을 두드렸다. 총각 울어? 아니요, 연기가 매워서요.

전생의 넷은 3년이 걸렸다. 셋이 하나씩 평생의 상처를 안고, 갈 데가 없어서, 남은 사람끼리 모였다. 이번엔 아무도 상처를 안고 오지 않았다. 셋 다 스스로 골랐다. 백광 말고, 이쪽을.

* * *

할머니들이 하나둘 돌아간 뒤 넷이 계단을 올라갔다. 윤하가 앞장섰다. 소율이 그 뒤를 따랐다. 예린이 내 옆에서 걸었다. 계단이 좁아 어깨가 닿았다.

"오늘 저녁은 뭐 먹어요?"

소율이 앞에서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떡볶이 말고요."

"라면이요. 계란 넣어서."

윤하가 대답했다. 계란 소리에 예린이 나를 보고 웃었다. 소율만 영문을 몰랐다. 계란이 뭐가 웃기냐고 따졌다.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진료소를 나서다 계단 위 성당 앞에 멈춰 섰다.

골목 끝에 마광철이 서 있었다. 검은 차 옆에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화상 입은 쪽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가 허리를 아주 조금 숙였다. 통화 상대에게.

"네, 대표님."

바람이 그쪽에서 불어왔다. 목소리가 여기까지 실려 왔다.

"강이현. 불을 맨손으로 쥐었습니다."

잠깐의 침묵.

"다음엔 태워 주겠습니다."

그의 휴대폰은 불에 그을려 스피커가 망가져 있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그대로 새어 나왔다. 느긋하고 정중한 목소리. 십 년 동안 등 뒤에서 듣던.

"아니."

그 한마디에 골목 공기가 식었다. 마광철의 불보다 그 목소리가 더 차가웠다. 손바닥의 붉은 자국이 두근, 뛰었다.

마광철이 굳었다. 차 문을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다음엔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