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18화 · 백광

시험장을 사서, 뭘 하려는 거지.

그 질문을 들고 그날 저녁 포장마차에 앉았다.

* * *

그날 밤. 고시원에서 두 골목 떨어진 포장마차.

비닐 천막 안, 플라스틱 테이블. 주인 할머니가 오뎅 국물 두 그릇과 소주 두 병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잔이 두 개였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오 팀장이 내 잔을 채웠다. 넘칠 만큼.

"한 잔만요. 내일 일이 있어서."

"백수가 무슨 일."

"……백수도 바빠요."

그가 피식 웃었다. 자기 잔을 비웠다. 술이 들어가자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왔다. 낮에 다섯을 세던 그 어깨였다. 오늘 그는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오래 생각한 얼굴이었다.

"백광, 어떤 데예요?"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젓가락으로 오뎅을 하나 집었다. 먹지 않고 국물 위에서 굴렸다.

"돈."

한 단어였다.

"모기업이 건설 회사랑 경비 회사야. 그쪽 자금을 그대로 끌어왔어.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땅을 사 모았더라. 게이트 열린 자리 근처만 골라서.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하게."

오뎅을 하나 더 굴렸다.

"사람. B급 이상만 서른 명. 열흘 만에. 협회가 측정회 한 번 하는 동안 저쪽은 B급을 서른 명 모았어. 계약금이 우리 연봉의 열 배다."

"장비는요?"

"마석 가공 공장. 게이트에서 나오는 돌을 녹여서 무기를 만든다더라. 협회는 아직 그 돌이 뭔지도 몰라."

그가 오뎅을 드디어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제 협회 시험장까지."

전생의 백광이 떠올랐다. 강남의 흰 빌딩, 28층 길드장실. 나는 27층에서 10년을 일했다. 그 10년 동안 백광이 어디서 돈을 끌어오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건우 형이 알아서 한다고 믿었다.

오 팀장이 잔을 채웠다. 목소리를 낮췄다.

"웃긴 건, 백야교 사건 뒤에 백광 재단 기부금이."

그가 잔을 들었다.

"딱 끊겼다는 거야."

젓가락이 멈췄다.

백야교의 돈줄……

하진. 하진은 좋은 사제였는데, 하던 귓속말. 측정회장에서 그가 했던 말이 갑자기 다른 뜻으로 들렸다.

"내가 한 말 아니다."

오 팀장이 잔을 비웠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왜 저한테 이런 얘길 하세요?"

"오늘 신입 다섯을 데리고 나왔으니까."

그가 빈 잔을 내려다봤다. 한참.

"작년에 둘을 못 데리고 나왔다. 그때 누가 나한테 이런 얘길 해 줬으면, 뭐가 달랐을지 모르지."

그가 일어섰다. 천 원짜리 몇 장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러다 멈췄다.

"그리고…… 서윤하."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걔 잘 부탁한다."

"……네. 약속할게요."

그가 천막을 걷고 나갔다. 밖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났다.

* * *

4월 25일. 진료소가 다시 문을 열었다.

성당 신부님이 지하 계단의 깨진 형광등을 갈았다. 예린이 넘어진 철제 침대를 세우고 바닥을 닦았다. 윤하는 근무라 못 왔다. 대신 아침에 예린 손에 호루라기 하나를 쥐여 주고 갔다. 협회 지급품이었다.

아침 내내 둘이 진료소를 치웠다. 그녀가 바닥을 닦고, 내가 넘어진 선반을 세웠다. 선반 위 약통을 정리하던 그녀가 까치발을 들었다. 손이 맨 위 칸에 닿지 않았다. 뒤에서 대신 올려 줬다. 그녀의 등이 내 가슴에 닿았다. 그녀가 그대로 멈췄다.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이현 씨는 키가 커서 좋네요."

"저 백수라 쓸모가 이것뿐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주 가까이서 나를 올려다봤다. 호박색 눈이 웃고 있었다.

"아니에요. 쓸모 많아요."

그러고는 몸을 빼 걸레를 다시 집었다. 귀가 빨갰다. 나는 맨 위 칸에 약통을 마저 올렸다. 손이 조금 떨렸다. 괴력 때문이 아니었다.

오전 열 시.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럿이었다.

예린의 손이 멈췄다. 걸레를 쥔 손가락이 하얘졌다.

"선생님!"

할머니들이었다. 다섯, 여섯. 손마다 귤 봉지와 떡과 반찬통을 들고 있었다.

"우리 걱정했어!"

"아가씨 없어진 날 밤에 우리가 경찰서도 갔어."

"신부님이 다 괜찮다고 해서 기다렸지."

예린이 걸레를 떨어뜨렸다. 할머니들을 하나씩 봤다. 입술이 떨렸다.

"다들…… 와 주셨네요."

할머니 하나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른 할머니가 등을 두드렸다. 예린이 그 품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떨면서.

나는 계단 아래 서서 그걸 봤다. 할머니들 어깨 너머로 그녀의 금발이 흔들렸다. 2028년의 그녀를 꺼냈을 때,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료소는 사라졌고, 할머니들은 흩어졌다. 그녀는 그 3년 동안 자기를 기다린 사람이 있었는지 끝내 몰랐다.

지금은 있었다. 여섯이나.

* * *

대기실 벤치가 셋 다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날 밤 신도들이 걷어찬 것이었다.

창고에 있던 성당 벤치를 가져오기로 했다. 무거운 원목 벤치였다. 하나씩 나르려다 그냥 셋을 한꺼번에 들었다. 괴력으로. 어깨에 둘, 팔에 하나.

계단을 내려오자 할머니들이 입을 벌렸다.

"총각 힘 좋네! 우리 손자 줘야겠다!"

"……떡볶이 값 하러 왔어요."

지난번 고시원 떡볶이는 예린이 샀다. 그 값이었다. 예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벤치를 내려놓는데 대기실 구석에서 누가 코웃음을 쳤다.

소율이었다. 보라색 코트를 입고 할머니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떡볶이 때문에 왔다고 했다. 할머니 하나가 그녀의 일자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며 감탄했다.

"아이고, 머리가 참 까맣다. 우리 손녀도 이렇게 길렀으면 좋겠는데."

소율이 어쩔 줄 몰라 굳어 있었다. 낯을 가리는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소율의 손끝에서 보랏빛이 아주 조금 새어 나왔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하나, 둘.

그리고 셋.

보랏빛이 사그라들었다.

혼자서도 세고 있다.

그녀가 눈을 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들켰다는 얼굴이었다. 입 모양으로 말했다. 보지 마요. 그러고는 할머니가 쥐여 준 귤을 까기 시작했다. 아주 열심히.

* * *

오후 한 시. 진료소 앞에 검은 승용차가 섰다.

흰 정장을 입은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은테 안경, 단정하게 빗은 머리. 가슴에 금빛 해 문양 배지.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백광 길드 인사팀입니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린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차예린 씨, B급 치유사 맞으시죠?"

측정회 결과는 나흘 전에 나왔다. 명부는 그날 저녁에 샜다. 오 팀장 말이 맞았다.

"……네."

남자가 서류 가방을 열었다. 계약서를 꺼내 벤치 위에 펼쳤다. 할머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계약금 3억. 전속 치유사. 숙소와 경호 제공."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3억?!"

할머니 하나가 소리쳤다. 다른 할머니들이 웅성거렸다. 3억이면 집이 몇 채냐고.

소율이 내 옆에서 중얼거렸다.

"떡볶이가 몇 그릇이야."

예린은 계약서를 보지 않았다. 남자의 배지를 보고 있었다. 금빛 해 문양.

백광의 전속 치유사.

전생 2028년, 백야교 지하에서 백광 출신 치유사들을 봤다.

예린 옆의 제단들이었다. 흰 옷을 입은 치유사 넷. 셋은 이미 숨이 없었다. 그들의 손목에는 백광 전속 치유사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백광이 실종 신고를 한 치유사들이라고만 들었다. 백광은 그 사건 뒤에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넉넉히 줬다. 다들 고마워했다.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예린이 계약서를 반듯하게 접었다. 남자에게 돌려줬다. 다정한 목소리 그대로.

"감사하지만, 저는 여기 있을게요."

그녀가 할머니들을 돌아봤다.

"할머니들 무릎이 아직이라서요."

할머니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하나는 아이고 우리 선생님, 하며 눈가를 훔쳤다. 다른 하나는 남자에게 귤 하나를 쥐여 줬다. 먼 길 왔으니 이거라도 먹고 가라고. 남자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 그리고 다시 펴졌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

그가 명함을 벤치에 놓고 계단을 올라갔다. 명함에 금빛 해 문양이 찍혀 있었다.

* * *

오후 3시.

할머니들이 점심으로 가져온 떡을 나눠 먹고 막 낮잠에 빠질 무렵이었다. 진료소 안이 이상하게 더웠다. 4월 말인데 한여름 아스팔트 같은 열기가 계단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할머니 하나가 부채질을 했다.

발소리가 났다. 무거웠다. 계단 하나를 디딜 때마다 쿵, 쿵.

거구였다. 문틀을 고개 숙여 지나와야 할 만큼. 빨간 머리를 바짝 밀어 두피가 붉게 비쳤다. 얼굴 왼쪽 절반이 화상 흉터로 일그러져 있었다. 녹았다가 굳은 촛농 같은 피부. 흰 정장 재킷이 어깨에서 터질 것 같았다.

그가 계단을 내려와 진료소 바닥을 디뎠다. 발밑 리놀륨 바닥이 그을렸다. 걸음마다 검은 발자국이 남았다.

마광철. 백광 길드 행동대장.

그 이름을 십 년 동안 들었다. 백광 사무실 복도에서, 길드원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마 대장이 또 처리했대. 무엇을 처리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묻지 않았다. 그게 내가 10년 동안 한 일이었다. 묻지 않는 것.

전생에 이 사람은 백광의 더러운 일을 전부 했다. 2031년, 그는 예린이 지키던 치유소에 불을 질렀다.

그가 진료소를 둘러봤다. 할머니들, 벤치, 예린. 벤치 위의 명함.

"인사팀이 일을 못 하네."

그가 명함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불꽃이 피었다.

화르륵.

명함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할머니들이 비명을 질렀다. 예린이 할머니들 앞으로 나섰다. 손바닥을 펴서.

"여긴 진료소예요. 불은 꺼 주세요."

다정한 목소리였다. 떨리지 않았다.

마광철이 웃었다. 일그러진 얼굴 절반이 같이 웃었다.

"거절은 안 받는데."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바닥이 그을렸다. 열기가 밀려왔다.

대기실 구석에서 소율이 일어섰다. 손끝에서 보랏빛이 튀고 있었다. 이번엔 세는 걸 잊은 얼굴이었다. 눈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소율이 터지면, 세 번째다.

잠실 하늘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진료소 천장 너머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소율의 손목을 붙잡아 내 등 뒤로 당겼다. 예린 옆에 섰다. 마광철과 그녀 사이에.

손바닥이 뛰었다. 두근. 붉은 자국이 열기에 반응하듯이.

"그 사람, 싫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