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내 뒤로."
윤하의 목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신입 셋이 그녀 등 뒤로 모였다. 나는 맨 뒤에 섰다. 계획대로. 그녀가 앞에 서게.
트롤이 균열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동굴 바닥이 패였다. 동굴 천장에 머리가 닿았다. 바위로 된 피부가 숨 쉴 때마다 삐걱거렸다. 등의 붉은 수정이 맥박처럼 빛났다.
놈이 주먹을 들었다.
* * *
쿵.
주먹이 동굴 바닥을 내리쳤다. 땅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바위가 떨어졌다. 무릎만 한 바위가 수아 머리 위로.
"수아 씨, 내 뒤로!"
태오였다. 허세 부리던 대검을 버리고 수아 앞으로 몸을 던졌다. 바위가 그의 등을 때렸다. 그는 수아를 감싼 채 날아가 동굴 벽에 부딪혔다.
윤하가 뛰었다. 숨을 내쉬었다. 칼날을 따라 하늘색 빛이 번졌다. 일섬.
쨍.
칼끝이 트롤의 옆구리에 닿았다. 그리고 튕겼다. 바위 가죽에 하얀 줄 하나만 남았다. 그녀의 손목이 꺾일 뻔했다.
안 들어간다.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트롤이 팔을 휘둘렀다. 정민 쪽으로. 정민이 작은 방패를 들었다.
쾅.
방패가 깨졌다. 정민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트롤이 다시 팔을 들었다. 정민은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윤하가 정민 위로 몸을 던졌다. 감쌌다. 트롤의 손톱이 그녀의 왼팔을 긁고 지나갔다. 제복 소매가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그녀가 비명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정민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정민 씨, 일어나요."
자기 팔에서 피가 흐르는데.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 * *
"기둥 뒤로!"
정민을 들쳐 업었다. 굳은 몸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모두 동굴 한쪽의 커다란 돌기둥 뒤로 숨었다. 태오가 수아에게 기대 절뚝이며 왔다. 등에서 피가 났다. 그래도 웃고 있었다. 허세가 아닌 웃음이었다.
기둥 그림자 속에서 숨을 골랐다. 트롤을 봤다.
놈이 기둥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포효했다. 크아아.
그 순간 등의 붉은 수정이 확 밝아졌다. 그리고 아까 윤하의 칼이 남긴 하얀 줄이, 옆구리의 그 상처가, 스르륵 붙었다. 바위가 녹았다가 굳는 것처럼.
다시 봤다. 놈이 또 포효했다. 수정이 빛났다. 태오의 대검이 남긴 긁힌 자국도 붙었다.
울 때마다 등의 수정이 빛나고 가죽이 붙는다.
핵은 등이다.
전생에도 이런 놈들이 있었다. 몸 어딘가의 핵이 몸 전체를 고친다. 그 핵을 깨기 전에는 아무리 베어도 소용없다. 그리고 핵은 늘 가장 단단한 곳에 숨어 있었다. 이놈의 등은 바위 갑옷이 겹겹이 덮여 있었다.
단월이면 연다. 한 번. 그런데 반동으로 팔이 늦다. 열린 틈은 금방 닫힌다. 그 틈에 누군가 찔러야 했다.
윤하를 봤다. 그녀가 피 흐르는 팔을 제복 상의로 동여매고 있었다. 이로 매듭을 당기면서. 그녀가 나를 봤다.
"등의 갑옷, 제가 엽니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열리면 일섬으로. 수정을."
그녀가 나를 한참 봤다. 얼음색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거짓말을 찾는 눈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눈이었다.
"……이번엔 '감'이 아니죠?"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하얬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이었다.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제복 안주머니 쪽으로 왼손이 갔다. 소율의 구슬이 든 자리였다. 한 번 꾹 눌렀다.
신입들을 봤다. 셋 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 도망칠 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수아 씨는 눈. 태오 씨, 정민 씨는 소리로 끌어요."
"저, 저는……"
수아가 활을 끌어안았다. 안경이 비뚤어져 있었다. 손이 떨렸다.
"눈이요. 딱 한 발이면 돼요. 저놈이 고개를 돌리게."
그녀가 숨을 삼켰다.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
* * *
트롤이 기둥을 돌아 나왔다.
수아가 일어섰다. 시위를 당겼다. 손이 떨렸다. 숨을 내쉬었다. 윤하가 소율에게, 소율이 나에게 배운 그 방법으로. 떨림이 멎었다.
……눈.
화살이 날아갔다. 트롤의 왼쪽 눈에 박혔다.
트롤이 포효하며 몸을 비틀었다. 정민이 기둥 뒤에서 뛰어나왔다. 깨진 방패 조각을 들고. 그걸 바위 벽에 대고 미친 듯이 두드리며 소리쳤다.
"엄마한테…… 점심 먹고 간다고 했으니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울고 있었다. 그래도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쪽이다, 돌덩이!!"
태오가 반대편에서 대검으로 바닥을 긁으며 외쳤다. 피 흘리는 등으로.
트롤이 두 소리 사이에서 머리를 휘저었다. 등이 나를 향했다.
천장에서 떨어진 바위들이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동굴 안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먼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장검을 뽑았다. 칼끝에 마력을 모았다. 먼지 너머, 동굴 천장 너머의 보이지 않는 달을 봤다.
단월.
보랏빛 초승달이 먼지를 갈랐다. 트롤의 등에 박혔다. 겹겹의 바위 갑옷이 비스듬히 갈라졌다. 그 틈으로 붉은 수정이 드러났다. 사람 머리만 한, 맥박 치는 수정.
팔이 저렸다. 반동이었다.
"방금 빛……?"
정민이 방패 조각을 든 채 멈췄다. 먼지 속에서 보랏빛만 봤을 것이다.
그때 은빛이 먼지를 뚫었다.
윤하였다. 그녀의 몸이 한 줄기 선이 됐다. 하늘색 빛이 칼날을 따라 번졌다. 피 흘리는 왼팔은 쓰지 않았다. 오른팔 하나로. 발이 먼저 나갔고, 칼이 따라갔고, 몸이 빠지고 있었다.
서윤하, 일섬.
하늘색 일직선이 갈라진 갑옷 틈으로 꽂혔다. 붉은 수정 한가운데로.
쩌억.
수정에 금이 갔다. 금이 퍼졌다. 수정이 깨졌다.
트롤이 멈췄다. 포효하려고 벌린 입이 그대로 굳었다. 바위 피부가 회색으로 바래더니 부서져 내렸다. 거대한 몸이 동굴 바닥에 무너졌다.
……들어갔다.
윤하가 칼을 짚고 서서 헐떡였다.
"사…… 살았다아……."
태오가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등의 피가 흙에 배어 들었다. 웃고 있었다.
【레벨 업】 【레벨 15 → 17】 【탈출 경로가 다시 열렸습니다】
회수 창은 뜨지 않았다. 당연했다. 마지막 일격은 윤하였다. 회수는 내가 쓰러뜨린 적에게만 쓸 수 있다.
아쉽지 않았다. 그 일섬은 그녀의 것이어야 했다. 전생의 그녀가 7년 걸려 낸 빛을, 지금의 그녀가 열흘 만에, 자기 손으로, 지켜야 할 사람들 앞에서 냈다. 그 빛을 내가 빼앗을 수는 없었다. 빼앗을 수 있다 해도.
* * *
탈출석을 다시 깼다. 이번엔 들었다. 몸이 붕 떴다가 한강 다리 아래 공터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눈부셨다. 강물 냄새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동굴의 젖은 돌 냄새를 씻어 내듯이. 다리 위로 차들이 지나갔다. 교각이 웅웅 울렸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오 팀장이 펜스 앞에 서 있었다. 탐지기를 든 손이 하얬다. 그가 우리를 하나씩 셌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다섯. 다 있네."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작년에 둘을 잃은 사람의 어깨였다.
태오가 펜스에 기대 주저앉았다. 피 묻은 등을 철망에 붙인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리 밑 그늘 너머로 하늘이 파랬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늘이 원래 이렇게 파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정민이 흙투성이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려서 두 번 잘못 눌렀다. 세 번째에 걸렸다.
"엄마. 나 점심 먹으러 가."
목소리가 갈라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정민이 아무 일 없다고, 그냥 배고파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울었다.
태오가 등을 붙잡고 윤하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선배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수아가 그 옆에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안경이 코끝까지 흘러내렸다. 활을 끌어안은 손에 화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딱 한 발을 쏘고, 나머지는 떨면서 다 떨어뜨렸다고 했다. 그 한 발이면 됐다.
"선배 아니에요! 저도 F급……"
윤하가 말을 멈췄다. 오 팀장이 서류철을 펼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서윤하, E급 승급.
그녀가 그 글자를 봤다. 한참.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빨갰다. 피 흐르는 팔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옆으로 갔다.
"팔은요?"
"E급 됐으니까 괜찮아요."
말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그녀가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거두고 나를 봤다. 목소리를 낮췄다.
"그 빛, 이현 씨죠?"
"……감이에요."
"거짓말."
그녀가 내 어깨를 톡 쳤다. 다친 팔로. 그러고는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천막 옆 구급상자를 가져와 그녀를 강가 계단에 앉혔다. 동여맨 제복 상의를 풀었다. 손톱 자국 셋이 팔뚝을 가로질러 있었다. 깊지는 않았다. 소독약을 붓자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내 무릎을 붙잡았다.
붕대를 감았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내 손을 봤다. 강바람에 은빛 머리카락이 내 손등을 스쳤다.
"이현 씨 손, 오늘은 안 떨리네요."
"윤하 씨가 안 떨어서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가까웠다. 강물 소리만 났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다, 붕대 매듭을 내려다봤다. 매듭이 예뻤다. 그녀가 엄지로 매듭을 쓸었다.
오 팀장이 서류철을 덮고 다가왔다. 내 앞에 섰다. 안경 너머로 나를 오래 봤다.
"맞았다."
그 한마디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소주는요? 한 병 더 사 주신다면서요."
그가 피식 웃었다.
"……오늘 저녁."
* * *
그가 돌아서려다 휴대폰을 꺼냈다.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화면을 보던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협회 공문이었다.
[다음 달부터 협회 승급 시험 게이트 운영권을 백광 길드에 위탁함.]
발송 시각은 오전 10시 52분. 우리가 균열 안에 갇혀 있던 때였다.
"백광이 시험장을 통째로 샀다."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생에도 이 사고 뒤에 협회는 시험장을 외부에 넘겼다. 그때도 백광이었다. 그 뒤로 협회 신입들은 하나둘 백광 배지를 달았다. 승급이 거기서 결정됐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사고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공문은 똑같이 왔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마치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처럼.
시험장을 사서, 뭘 하려는 거지. 강바람이 갑자기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