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10화 · 계란 한 판

새벽 6시. 폐교회 앞.

비가 그쳐 있었다. 언덕 아래로 서울이 펼쳐져 있었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2035년의 붉은 하늘과는 다른 색이었다. 따뜻한 붉은색.

예린이 교회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내 검은 점퍼를 어깨에 두르고, 무릎을 끌어안고.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해가 언덕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첫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해를 다시 보네요."

그녀가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햇살을 똑바로 보면서.

그녀가 손을 들어 햇살을 가렸다. 그 손을 봤다.

손이 떨리지 않는다.

2028년의 그녀는 해를 보고 울었다. 3년 만에 본 해였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해가 뜰 때마다 손이 떨렸다. 지금 그녀는 다섯 시간 만에 해를 봤다. 그리고 떨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윤하가 협회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실종자 일곱 명, 구급차 일곱 대. 반듯한 목소리로 주소를 불렀다. 통화를 끝내고 돌아서는 얼굴은 반듯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아는 얼굴이었다.

"저, 오늘 아침에 죽었어요."

"네?"

"아홉 시에 팀장님 보고 들어가야 해요. 무사히 나오면 연락할게요."

* * *

예린은 갈 곳이 없었다.

"성당 사택은 신부님께 폐가 될 것 같아서요."

고시원 307호 앞에서 그녀가 말했다. 손에 든 건 진료소에서 챙겨 온 앞치마 하나와 금 간 휴대폰뿐이었다. 백야교 신도는 하진이 죽어도 남아 있었다. 진료소도, 사택도, 그들이 다 알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녀가 한 평 반짜리 방을 들여다봤다. 컵라면 용기 탑, 의자 위 빨래, 얇은 이불 한 장.

"며칠만이요. 저는 옥상에서 자면 돼요."

"그건 안 돼요."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단호하게 잘랐다. 다정한 목소리 그대로, 그런데 단호하게. 치료를 거부하는 할아버지들한테 쓰던 목소리였다.

"이현 씨가 침대 쓰세요. 다치셨잖아요. 저는 바닥이 편해요."

"예린 씨가 침대요."

"싫어요."

"저도 싫어요."

한참 서로를 봤다. 결국 내가 이겼다.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방을 다시 둘러봤다.

"……검소하시네요."

"백수라서요."

그녀가 웃었다. 볼에 보조개가 파였다. 하얀 방에서 나온 지 몇 시간 만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앞치마를 무릎 위에 펼쳤다. 손바닥으로 주름을 폈다. 한 번, 두 번.

"저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신부님이 대학까지 보내 주셨고요. 간호학과요. 등록금은 성당 분들이 조금씩 모아 주셨어요."

손바닥이 앞치마 위에서 멈췄다.

"그래서 이 손이 생겼을 때, 이제 갚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신부님한테도, 그분들한테도."

전생의 그녀는 이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십 년 동안. 보육원도, 신부님도. 나는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묻지 않았으니까.

"갚았어요."

그녀가 나를 봤다.

"할머니들 무릎으로."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고개를 숙였다. 앞치마를 쥔 손등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 * *

오전 11시. 똑똑.

문을 열자 은빛 포니테일이 큰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제복 차림, 눈 밑이 퀭했다.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감시하러 왔어요. 협회 지시예요."

"협회 지시 맞아요?"

"맞아요! 거의요! 절반은 제 판단이에요!"

말이 빨라졌다. 가방에서 칫솔과 수건이 비죽 나와 있었다. 그 옆으로 협회 지급 침낭 하나가 말려 있었다. 감시가 하룻밤으로 끝날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예린이 그 침낭을 보고 나를 봤다. 아무 말 없이 웃었다.

1인실에 셋이 됐다. 예린이 침대 끝, 나는 책상 의자, 윤하는 문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았다. 무릎 셋이 한가운데서 부딪혔다.

윤하가 오늘 아침 일을 털어놓았다. 오 팀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투덜거리는 반말을 그녀가 하니 이상하게 웃겼다.

"신도 열넷 기절. 사제 사망. 지하 방에서 실종자 일곱 명 발견. 신고자는 익명. 그리고 현장엔 우리 신입이 있었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지, 지나가다가요! 했죠."

"……새벽 세 시에 서울 외곽을요?"

"팀장님도 그렇게 말했어요. 똑같이."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탐지기 반출 두 번, 시말서. 그리고 같이 있던 놈 누구냐고. 말 못 한다고 했어요."

예린이 윤하를 봤다. 처진 눈이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반쯤 젖어 있었다.

쾅.

벽이 울렸다.

"셋이서 뭐 하는 거야!!"

윤하가 벌떡 일어나 벽에 대고 외쳤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일어나다 선반에 머리를 부딪혔다. 반창고 붙인 바로 그 자리였다. 예린이 입을 막고 어깨를 떨었다. 윤하는 머리를 문지르며 빨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내 탓이라는 듯.

나는 웃었다. 소리 내서.

* * *

저녁 7시.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털었다. 지폐 몇 장과 동전을 계산대 위에 쏟아 하나씩 셌다. 아르바이트생이 기다렸다. 백 원짜리가 두 개 모자랐다. 주머니를 뒤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하나를 찾았다. 아르바이트생이 작게 박수를 쳤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통장 잔고는 이제 이만 원 남짓이었다. 월세 날은 다음 주였다. 그래도 계란은 샀다.

계란 한 판. 오늘은 산다.

공용 주방에서 라면 세 개를 끓였다. 물은 정확히 계량했다. 냄비 하나에. 계란 셋을 깨 넣었다. 노른자 셋이 국물 위에 동그랗게 떠올랐다.

그릇이 둘뿐이라 냄비는 내 차지였다. 셋이 공용 주방의 좁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었다. 국물보다 면을 먼저. 십 년 동안의 버릇이었다.

예린이 그걸 보고 웃었다.

"면부터 드시네요."

젓가락이 멈췄다.

대장은 꼭 면부터 먹더라.

삼 년째 겨울, 무너진 편의점에서 소율이 했던 말이었다. 같은 장면, 다른 입.

그때 윤하의 젓가락이 냄비 안으로 들어왔다. 내 노른자를 정확히 집어 갔다.

"이건 제 거예요."

반듯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대장 계란은 제 거예요.

몸이 굳었다. 젓가락을 쥔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숨이 목에 걸렸다.

같은 말이었다. 같은 얼굴이었다. 무릎이 아파 걷지도 못하던 겨울, 계란 뺏는 손만은 빨랐던 그 사람이 지금 두 다리로 멀쩡히 앉아서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윤하가 내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어, 어? 드실 거였어요? 돌려 드릴까요?"

"아뇨."

웃음이 터졌다. 멈추지 않았다. 웃다가 눈가가 젖었다. 국물 김 때문이라고 치기로 했다.

……그래. 이번엔 계란이 있다.

한 판이나.

윤하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계란을 입에 넣은 채로. 볼이 계란 모양으로 불룩했다. 그 얼굴이 우스워서 또 웃었다.

예린은 웃지 않았다. 조용히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다친 데를 찾는 눈이었다. 그러다 자기 그릇의 계란을 반 갈라 내 냄비에 넣어 줬다. 전생의 그 겨울처럼.

* * *

잠자리는 금방 정해졌다. 예린이 침대, 나는 바닥, 윤하는 문 옆 벽에 기대 시말서를 쓰다 자겠다고 했다. 바닥에 누우니 침대에서 늘어진 예린의 손이 내 어깨 바로 위에 있었다. 문 옆 윤하의 발끝이 내 발목에 닿았다. 셋이 누운 게 아니라 끼워 넣어진 것 같았다.

밤 9시. 예린이 먼저 잠들었다. 얼마 안 가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였다. 하얀 방 꿈이었다.

일어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괴력이 들어가지 않게, 손가락 끝까지 조심해서.

전생에도 이랬다. 그녀가 이렇게 깨면 나는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문 앞에서만. 손은 한 번도 잡지 않았다.

"괜찮아요. 고시원이에요. 벽 노란색이에요."

그녀가 눈을 떴다. 누런 벽지를 봤다. 숨을 고르며 내 손을 꽉 쥐었다.

문 옆에서 윤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말서 종이가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우리 둘의 잡은 손을 봤다. 아무 말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척이었다. 속눈썹이 떨렸다.

예린이 다시 잠들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가 잠든 뒤에도 한참 놓지 못했다.

* * *

밤 10시. 고시원 옥상.

빨래 건조대 옆에 윤하와 나란히 섰다. 아래층 방에서 예린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손을 놓고 나올 때 그녀가 잠결에 내 소매를 한 번 붙잡았다가 놓았다.

"오 팀장님이요."

그녀가 난간을 쥐었다.

"이현 씨 등록 안 하면, 이번 건 제가 다 덮어쓰래요. 내일 측정회에 데려오래요."

"……."

"거절하셔도 돼요. 시말서 정도는 쓸 수 있어요."

그녀가 웃었다. 괜찮다는 웃음이었다. 괜찮지 않은 웃음이었다. 탐지기 두 번, 무단 출동, 사제 사망 현장. 시말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등록하면 그놈 눈에 띈다.

……이미 띄었다.

하진의 휴대폰 너머에서 그가 웃었다. 그 백수가 맞네. 이름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숨을 이유가 하나 사라졌다.

"갈게요. 측정회."

그녀가 나를 봤다.

"……정말요?"

"대신 실력은 숨겨요. F급으로."

"그건 제가 못 도와드리는데요."

"알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것도 안 부수고."

"그게 제일 걱정인데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내밀었다. 협회 내부 공지였다.

[제1회 헌터 등급 측정회 — 4월 20일(일) 오전 10시, 삼성동 컨벤션 홀]

[내빈 — 백광 길드 길드장 백건우]

* * *

옥상 난간 너머로 골목을 내려다봤다.

고시원 앞 골목 끝에 흰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시동을 켠 채로.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차였다.

뒷좌석 창문이 반쯤 내려가 있었다. 실내등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 누군가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흐린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서울역 CCTV를 캡처한 것. 쇠파이프를 든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

뒤로 넘긴 회금발. 흰 정장 소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옥상을 올려다봤다. 금색 눈이 정확히 나를 찾았다.

입 모양은 읽혔다. 십 년을 옆에서 본 입이었다.

내일 보자.

창문이 올라갔다. 흰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붉은 미등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난간을 쥐고 서 있었다. 쇠 난간이 손 모양대로 휘었다.

옆에서 윤하가 그걸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괴력이 풀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