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9화 · 성흔

"축복합니다. 손님이 오셨네요."

하진이 제단 앞에 섰다. 두 팔을 벌렸다.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리던 그 자세로.

"그 진료소의 환자분이군요."

【차예린 — 의식 종료까지 2시간 30분】

장검을 고쳐 쥐었다. 비에 젖은 손잡이가 미끄러웠다.

"그 사람, 돌려받으러 왔다."

"돌려받다니요."

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성녀님은 모두의 것이에요."

그가 제단 위의 예린을 돌아봤다. 그녀의 몸에서 금빛 실이 계속 뽑혀 수정 기둥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하진의 얼굴이 경건했다. 기도하는 사람처럼.

"치유는 가난한 자에게 닿지 않아요. 병원비가 없는 사람, 보험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이 빛을 평생 만나지 못해요. 우리는 그 빛을 병에 담아 나눌 뿐."

"병에 담아 비싸게 팔겠지."

"값은 신앙의 증거니까요."

그가 웃었다. 진심이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2028년 토벌 때도 그랬다. 백야교의 사제들은 마지막까지 자기들이 사람을 구한다고 믿었다.

진료소의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우리 영감 허리도 그 손으로 나았어. 돈 한 푼 안 받고. 그 손을 병에 담아 천만 원에 판다.

"F급이 여기까지 오다니. 대견하네요."

F급. 그는 내 등급까지 알고 있었다. 협회 명부에도 없는 등급을. 진료소 옥상에서 알아봐 달라던 그 청년을, 하루 만에 다 알아본 것이다.

뛰어들었다.

* * *

세 걸음 만에 거리를 좁혔다. 괴력을 실은 검을 그의 어깨로 내리쳤다.

쩡.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하진 앞에 흰 육각형이 떠 있었다. 빛의 판. 검이 그 위에서 튕겨 나왔다. 손목이 꺾일 뻔했다. 몸이 뒤로 날아갔다.

와장창.

신도들이 쌓아 둔 의자 더미에 처박혔다. 나무 의자가 등 밑에서 부서졌다.

윤하가 그 틈에 옆으로 파고들었다. 칼끝이 하진의 옆구리를 노렸다. 정확했다.

쩡.

육각이 미끄러지듯 따라와 막았다. 그녀의 칼도 튕겼다.

하진이 손을 앞으로 밀었다. 육각이 커지며 앞으로 밀려 나왔다. 벽처럼. 일어나던 나와 윤하를 한꺼번에 밀어붙였다. 등이 예배당 벽에 부딪혔다. 숨이 막혔다. 육각이 우리 둘을 벽에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내 어깨에 눌렸다. 그녀가 신음을 삼켰다.

육각이 사라졌다. 우리는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윤하가 이를 딱딱 부딪쳤다. 비에 젖은 우비 안의 제복이 다 젖어 있었다. 하얀 방은 이상하게 추웠다. 숨이 하얗게 나왔다.

"여기 왜, 왜 이렇게 추워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진의 손만 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볼 여유가 없었다. 그게 미안했다. 나중에 사과하기로 했다.

성흔 방벽.

전생 토벌대 열둘이 저 방패 하나를 못 뚫었다. 일곱 시간 동안.

장검을 짚고 일어섰다. 칼끝에 마력을 모았다. 천장 너머 보이지 않는 달을 봤다.

단월.

보랏빛 초승달이 칼끝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진을 향해.

쩌엉.

초승달이 육각에 부딪혔다. 그리고 부서졌다. 보라색 파편이 흩어졌다. 육각은 흠집 하나 없었다.

하진의 실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그 빛, 어디서 배우셨죠?"

"……유튜브."

그가 웃었다. 소리 내서. 신도들의 기도 같은 웃음이었다.

* * *

숨을 골랐다. 그리고 봤다. 처음부터 다시.

윤하가 다시 찔렀다. 육각이 막았다. 하나, 둘, 셋. 육각이 사라졌다. 하진이 손을 다시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목에 감긴 흰 뱀 문양이 하얗게 빛났다. 빛이 꺼지고, 한 박자. 그다음에야 육각이 다시 섰다.

다시 봤다. 내가 단검을 던졌다. 육각이 막았다. 하나. 둘. 셋에 가까워질수록 육각의 빛이 엷어졌다. 투명해졌다. 단검이 튕겨 나가는 소리도 점점 가벼워졌다.

3초. 끝으로 갈수록 엷어진다.

다시 펴기 직전 목의 뱀이 빛난다.

빛이 꺼진 뒤 1초.

2028년의 토벌대는 이걸 몰랐다. 일곱 시간 동안 정면으로만 쳤다. 마지막에 사제가 지쳐 쓰러졌을 뿐이다. 그날 나는 막내였고, 뒤에서 방패만 들고 있었다. 지금은 앞에 있다.

계산했다. 단월은 하루 세 번. 하나는 이미 썼다. 마력은 절반 남짓. 회수에 마력이 전부 든다. 단월은 한 번 더만. 회수할 마력은 남긴다.

엷어지는 3초 끝에 단월. 그걸로 깨진다면, 다시 펴기까지 1초. 그 1초에 누군가 찔러야 한다.

나는 단월을 쓰고 나면 반동으로 팔이 늦다.

"윤하 씨."

그녀가 칼을 든 채 나를 봤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벽에 부딪힐 때 찢어진 것이다.

"방패가 깨지면 바로 왼쪽 어깨."

"……깨지면요?"

"깨요."

그녀가 나를 한참 봤다. 이마의 피가 눈썹을 타고 흘렀다. 그녀가 손등으로 피를 훔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하진에게 뛰어들었다. 장검으로 정면을 쳤다. 쩡. 육각이 섰다.

하나.

괴력으로 밀었다. 육각이 버텼다. 하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흔들리지 않았다.

둘.

육각의 빛이 엷어졌다. 그 너머로 하진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셋.

단월.

칼을 빼며 그었다. 보랏빛 초승달이 엷어진 육각 한가운데에 박혔다.

쩌적.

육각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그리고 깨졌다. 유리처럼. 흰 조각들이 공중에서 빛가루로 녹았다.

하진의 목에서 흰 뱀이 빛났다. 다시 펴려고.

그 순간, 내 옆을 은빛이 스쳤다.

윤하였다. 그녀의 몸이 한 줄기 선이 됐다. 칼날을 따라 얼음 같은 하늘색 빛이 번졌다. 처음 보는 빛이었다. 아니, 십 년 동안 본 빛이었다. 전생의 그녀가 7년 만에 처음 낸 그 빛.

서윤하 고유 스킬, 일섬.

하늘색 일직선이 뱀의 빛이 꺼진 1초 사이로 꽂혔다. 하진의 왼쪽 어깨에.

하진의 실눈이 처음으로 크게 떠졌다. 회색도 검은색도 아닌,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떻게……."

나는 이미 그의 앞에 있었다. 반동으로 저린 팔을 괴력으로 억지로 들어 올렸다.

검이 지나갔다. 짧게.

흰 사제복이 천천히 붉게 물들었다. 하진이 제단 옆에 무릎을 꿇었다.

【알림】 【조건 충족 — 적을 쓰러뜨렸습니다】 【고유 스킬 '회수'를 쓸 수 있습니다】

"회수."

무릎 꿇은 하진의 몸에서 흰빛 한 줄기가 빠져나와 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차가웠다. 백합 냄새가 났다. 손바닥의 붉은 자국이 그 흰빛을 삼키듯 잠깐 뜨거워졌다.

【스킬 회수】 【'성흔 방벽'을 회수했습니다】 【마력 → 0】

【스킬 정보】 【성흔 방벽 / 등급 D】 【흰 육각 방패를 펼친다 / 유지 3초】 【익숙해질수록 방패가 커진다】

* * *

새벽 5시 12분.

쩌저적.

수정 기둥에 금이 갔다. 기둥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금빛이 멈췄다. 기둥이 깨지며 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실이 되어 제단 위 그녀의 몸으로 돌아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단으로 달려갔다. 흰 옷 위로 금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손목의 쇠고리를 풀었다. 괴력으로, 그러나 그녀의 손목은 다치지 않게.

그녀의 속눈썹이 떨렸다. 호박색 눈이 떠졌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하얀 천장을 봤다가, 나를 봤다. 한참 동안.

2028년의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나를 봤다.

"또…… 와 주셨네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또?

진료소에서 만난 건 두 번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은 그 두 번을 말하는 눈이 아니었다. 더 오래된 무언가를 말하는 눈이었다.

물어보기 전에 그녀가 몸을 떨었다. 흰 옷 한 장이었다. 지하는 추웠다.

점퍼를 벗어 그녀에게 덮었다. 검은 후드 점퍼가 흰 옷을 가렸다. 그녀가 점퍼 깃을 쥐고 얼굴을 묻었다.

등 뒤에서 윤하가 칼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들리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까 제가 춥다고 했을 땐 못 들은 척하더니."

예린이 점퍼 깃 사이로 윤하를 봤다. 웃었다. 힘없이, 그러나 분명히.

"같이 와 주셔서 고마워요."

"아, 아뇨! 공무라서요!"

윤하가 칼을 칼집에 넣다가 두 번 헛넣었다.

손바닥을 펴 봤다. 성흔 방벽. 마력이 바닥이라 뜨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회복된 실낱만 한 마력을 짜냈다.

손바닥 앞에 흰 육각이 떴다. 손바닥보다 조금 컸다. 둥글넓적했다.

……아직 작다.

예린이 점퍼 깃 너머로 그걸 봤다.

"그거 방패예요? 접시예요?"

"……방패예요."

"접시 같은데요. 국 담으면 딱이겠어요."

정신을 잃었다 깬 사람이 할 농담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원래 이랬다. 아플수록 농담을 했다.

윤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예린도 따라 웃었다. 하얀 방에서, 처음으로 누군가 웃었다.

예배당 옆으로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윤하가 그 문을 열었다. 안에 간이침대 일곱 개가 놓여 있었다. 흰 천 아래 젊은 여자들이 누워 있었다. 명동 전단의 얼굴들이었다. 손목마다 금빛 실이 끊긴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윤하가 하나씩 맥을 짚었다. 일곱 번. 일곱 번째 손목을 놓고 그녀가 주저앉았다.

"다 살아 있어요. 다요."

목소리가 떨렸다. 전생의 기록에는 이 일곱의 이름이 없었다. 2028년 토벌 때 그 방에서 나온 사람은 예린 하나였다.

【레벨 업】 【레벨 10 → 14】 【차예린 — 구출 완료】

이번엔, 그날을 막았다. 3년이 아니라 다섯 시간 만에.

* * *

"형제님."

제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났다. 하진이었다.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사제복의 붉은 얼룩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웃고 있었다.

"그분이……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

"누구."

대답 대신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떨어졌다. 실눈이 반쯤 열린 채 멈췄다. 입꼬리는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진동이 울렸다. 그의 사제복 품 안이었다. 꺼내 보니 화면에 이름이 없었다. 번호도 가려져 있었다.

받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느긋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 보고는?"

나는 숨만 쉬었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낮게 웃는 소리.

"대답이 없네. 하진이 죽었다고?"

십 년 동안 등 뒤에서 듣던 목소리였다. 건우 형, 하고 부르면 늘 웃으며 돌아보던.

"그럼 그 백수가 맞네."

전화가 끊겼다. 꺼진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 위로 금색 눈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