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합니다.
그 목소리가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4월의 차가운 비. 고시원 계단을 뛰어 내려가 큰길에서 택시를 잡았다.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봤다. 검은 후드, 수건으로 감싼 긴 물건, 비에 젖은 얼굴.
"손님, 그거 뭐예요?"
"낚싯대요. 명동이요. 빨리요."
기사는 더 묻지 않았다. 액셀을 밟았다.
* * *
0시 31분.
진료소 계단 아래가 깜깜했다. 두꺼비집 레버가 내려가 있었다.
휴대폰 불빛을 비췄다. 철제 침대가 넘어져 있었다. 대기 의자들이 흩어져 있었다. 할머니들이 앉던 자리. 귤 껍질 하나가 바닥에 짓밟혀 있었다.
젖은 바닥 한가운데 쪽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접힌 메모지. 펼쳤다. 내 글씨였다. 숫자 하나를 두 번 고쳐 쓴 전화번호.
그 옆에 휴대폰이 엎어져 있었다. 화면에 금이 가 있었다. 통화 기록 맨 위에 내 번호.
쪽지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손바닥으로 꾹 누르던 손이 떠올랐다. 그 손으로 이걸 꺼내 쥐고 있었을 것이다. 전화를 걸 때까지. 그리고 떨어뜨렸을 것이다.
또. 늦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넘어진 철제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나흘 전 그녀가 내 팔을 무릎에 올려놓고 금빛을 피우던 그 침대였다. 시트에 아직 소독약 냄새가 남아 있었다.
전생, 2028년. 백야교 토벌.
막내였던 나는 그곳에서 3년 갇혀 있던 예린을 꺼냈다. 지하의 하얀 방, 제단 위.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내가 손목의 쇠고리를 풀어 주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날부터 그녀의 손은 떨렸다. 치유를 할 때마다. 십 년 동안.
그날 그녀의 첫마디는 이랬다. 늦었네요. 원망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였다. 그게 더 아팠다.
이번엔 3년이 아니라, 오늘 밤에 꺼낸다.
젖은 바닥의 쪽지를 주웠다. 번진 잉크를 손바닥으로 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것이었다. 돌려줘야 했다. 그녀 손에 직접.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일어났다.
기억을 뒤졌다. 2028년 토벌 때 들은 것. 백야교의 의식은 해가 뜰 때 끝난다. 첫 햇살이 제단에 닿는 순간, 성녀의 빛을 다 거둬 간다. 그 뒤로 남는 건 빈 몸뿐이다. 오늘 해 뜨는 시각, 새벽 5시 40분.
다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섯 시간이면 된다.
* * *
징징.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갔다.
"……이현 씨? 지금 새벽 1시……"
윤하였다. 잠긴 목소리였다. 협회 야간 당직이라고 했었다.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 받은 목소리.
"예린 씨가 끌려갔어요. 백야교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잠이 단번에 깬 소리였다.
"어디로요?"
"서울 외곽 폐교회 지하. 위치 보낼게요."
2028년 토벌 때 그곳 주소를 백 번은 봤다. 무너진 첨탑, 판자로 막은 창문.
"그걸 어떻게……"
그녀가 말을 멈췄다.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뇨. 묻지 않을게요."
"협회에 올려요?"
"정식으로 올리면 아침 회의 뒤에나 움직여요. 증거도 없고, 신고도 없으니까요."
잠깐의 침묵.
"그러니까 제 판단으로 갈게요."
그 말에 목이 막혔다. 원칙대로만 하던 사람이었다. 서른 장짜리 규정집을 다 외우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규정을 버리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피곤하고 짜증 섞인 중년 남자의 목소리. 서울역에서 그녀 이름을 고함치던 그 목소리였다.
"서윤하. 당직이 어디 가."
"급한 일이에요! 화장실이요! 아뇨, 출동이요!"
말이 빨라졌다. 핑계가 세 개나 겹쳤다.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종이컵을 내려놓는 소리. 야근하며 마시던 커피였을 것이다.
"……탐지기 또 가져가냐."
윤하가 대답하지 않았다.
"사고 치면 내 이름은 빼라."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가, 다시 멈췄다.
"……다치지는 말고."
오 팀장. 전생에 협회 감독관 중 유일하게 백광의 돈을 받지 않던 사람. 그래서 일찍 잘렸다.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금 나가요. 택시 탈게요."
윤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또렷했다.
* * *
새벽 3시 10분.
서울 외곽 언덕 꼭대기. 교회는 비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첨탑의 십자가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깨진 창문마다 판자가 박혀 있었다.
그런데 판자 틈으로 흰빛이 새어 나왔다.
택시에서 내린 윤하가 우산을 펴며 말했다.
"택시비 삼만 이천 원. 나중에 청구할게요."
"……네."
협회 건물 앞에서 그녀를 태우고 사십 분을 달렸다. 그녀는 우비 지퍼를 목까지 올린 채 뛰어나왔다. 운동화 끈도 덜 묶은 채였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가 탐지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화면만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이퍼 소리만 났다.
중간에 택시가 급정거했다. 그녀가 앞으로 쏠렸다. 팔을 뻗어 막았다. 내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젖은 머리카락이 내 턱에 닿았다. 그녀가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고마워요."
팔을 거뒀다. 그녀가 내 쪽으로 기울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어깨가 맞닿았다. 그 상태로 남은 길을 갔다. 둘 다 떨고 있었다. 추워서라고 치기로 했다.
그녀가 제복 위에 검은 우비를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 칼, 품 안에 탐지기. 탐지기 액정이 흰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정문 앞에 흰 후드 둘이 서 있었다. 가슴의 감은 눈 무늬가 판자 틈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문 옆 처마 밑은 깜깜했다. 비 오는 밤. 가로등도 없는 언덕.
빛 없는 곳은 다 내 길이다.
"여기 있어요."
윤하가 대답하기 전에 발밑 그림자로 꺼졌다.
담장 그림자에서 처마 그림자로. 문지기 하나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퍽.
장검 손잡이로 관자놀이를 쳤다. 쓰러졌다. 둘째가 돌아서며 입을 벌렸다.
빡.
괴력을 뺀 주먹으로 턱을. 힘 조절에 열 번은 실패했던 주먹이었다. 이번엔 맞았다. 둘째도 쓰러졌다. 숨은 쉬었다.
윤하가 우산을 든 채 뛰어왔다. 쓰러진 둘과 나를 번갈아 봤다.
"방금 어디로 간 거예요?!"
"나중에요."
"또!"
그녀가 우산을 접어 문 옆에 세웠다. 쓰러진 문지기 둘의 숨을 하나씩 확인했다. 살아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칼을 뽑았다.
* * *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문틈으로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러 사람이 같은 음을 낮게 끌고 있었다.
문을 밀었다.
지하 예배당이었다. 벽과 바닥과 천장이 전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하얀 방.
예린이 십 년 동안 들어가지 못하던 방이었다.
벽을 따라 흰 후드 열둘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노래는 그들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며.
가운데 돌 제단이 있었다. 그 위에 그녀가 누워 있었다. 흰 옷이 목부터 발끝까지 덮여 있었다. 금발이 제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몸에서 금빛이 뽑혀 나오고 있었다. 실처럼 가늘게. 금빛 실들이 제단 뒤에 선 거대한 수정 기둥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정 기둥 안에서 금빛이 소용돌이쳤다. 기둥 아래엔 작은 유리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병마다 금빛 액체가 담겨 있었다.
치유사의 마력을 뽑아 성수라는 이름으로 판다.
2028년 토벌 보고서의 첫 줄이었다. 그 병 하나가 강남에서 천만 원에 팔렸다.
윤하가 내 옆에서 숨을 멈췄다.
"사람한테…… 이런 걸."
속삭임이었다. 칼자루를 쥔 손등에 핏줄이 섰다.
이번엔 늦지 않는다.
"침입자다!"
신도 하나가 눈을 떴다. 노래가 끊겼다. 열둘이 일제히 일어났다. 손을 맞잡자 그들 앞에 흰 막이 솟았다. 비눗방울처럼 일렁이는 결계.
* * *
결계가 내 앞을 막았다. 주먹으로 쳤다. 괴력을 다 실어서.
쨍그랑.
막이 유리처럼 깨졌다. 그런데 그 뒤에 또 하나. 그 뒤에 또 하나. 넷이 손을 맞잡고 결계를 겹겹이 세우고 있었다. 깰 때마다 새로 섰다.
"윤하 씨!"
돌아봤다. 그녀가 결계 셋에 갇혀 있었다. 신도 셋이 그녀를 둘러싸고 흰 벽을 세웠다. 벽이 점점 좁혀 들었다. 그녀가 칼을 찔렀다. 칼끝이 벽에 튕겼다.
갈 수가 없었다. 내 앞에도 넷이 있었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좁혀 오는 흰 벽을 봤다. 그리고 멈췄다.
벽 셋이 맞닿는 모서리. 벽이 닫히는 순간, 그 이음매가 아주 잠깐 벌어졌다. 손가락 하나만 한 틈.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읽혔다.
발.
벽이 닫히기 직전, 그녀가 이음매로 파고들었다. 칼끝을 먼저 넣고, 발이 따라 들어가고, 몸이 빠져나갔다. 이음매 너머에서 결계를 세우던 신도의 손등을 칼끝이 정확히 찔렀다.
비명. 결계 하나가 꺼졌다. 둘째, 셋째. 그녀가 빠져나오면서 칼등으로 손목을 하나씩 내리쳤다.
나도 앞의 넷 중 둘의 손을 떼어 놓았다. 결계가 흔들렸다. 깨뜨렸다.
그녀가 내 쪽으로 뛰어왔다. 등이 내 등에 닿았다. 숨이 둘 다 가빴다.
"왼쪽 맡아요."
"오른쪽은 제가요."
둘이 돌았다. 그녀의 칼이 왼쪽 신도들의 손목을, 내 장검 손잡이가 오른쪽 신도들의 관자놀이를. 열둘이 하나씩 쓰러졌다.
마지막 하나가 쓰러졌을 때 그녀가 등 뒤에서 물었다. 숨을 고르며.
"발, 안 늦었죠?"
"……안 늦었어요."
등 너머로 그녀가 웃는 게 느껴졌다. 등에 닿은 그녀의 등이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렸다.
* * *
제단으로 뛰었다. 수정 기둥을 깨면 금빛 실이 끊길 것이다. 장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기둥에 닿기 직전, 흰빛이 터졌다.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바닥을 굴렀다.
기둥은 흠집 하나 없었다. 예린의 금빛은 계속 빨려 들어갔다.
결계의 핵은 사제가 쥐고 있다.
2028년에도 그랬다. 토벌대가 사제를 쓰러뜨린 뒤에야 기둥이 꺼졌다. 그 사제를 쓰러뜨리는 데 일곱 시간이 걸렸다.
짝. 짝. 짝.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제단 뒤 그림자에서 흰 사제복이 걸어 나왔다. 긴 은회색 머리, 목의 흰 뱀. 입꼬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축복합니다. 손님이 오셨네요."
하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실눈이 나를 훑었다.
"그 진료소의 환자분이군요."
【숨겨진 퀘스트】 【차예린 — 의식 종료까지 2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