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그 안에 레벨 10.
고시원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며 목록을 펼쳤다. 전생에 이 근처에서 열렸던 E급 게이트. 기억나는 건 넷이었다. 성수동, 회기동, 그리고 종로 둘.
【상태창】 【레벨 9 / 다음 레벨까지 82%】 【잠긴 기억 — 레벨 10에 열림】
18퍼센트. 그 18퍼센트가 하진의 흰 방패와 나 사이에 있었다.
* * *
4월 15일. 남은 3일. 성수동 공터.
공장 터 옆 하수도 입구에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안은 무릎까지 물이 찬 터널이었다. 냄새가 눈을 찔렀다.
몬스터는 개만 한 쥐들이었다. 이빨이 쇠를 갉았다. 떼로 몰려와 물속에서 발목을 노렸다.
그림자 걸음. 빛 없는 곳이면 된다.
터널 안은 빛이 없었다. 전부 그림자였다. 쥐 떼 뒤쪽 벽의 어둠을 노렸다. 10미터쯤. 발밑 그림자에 마음을 실었다.
차가운 물에 빠지는 감각. 눈앞이 깜깜해지고 귀가 먹먹했다.
첨벙.
튀어나온 곳은 벽 앞이 아니라 물웅덩이 한가운데였다. 허리까지 하수에 잠겼다. 쥐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10미터가 생각보다 길다.
허우적거리며 기어 나왔다. 하수가 입에 들어갔다. 뱉었다. 쥐 두 마리가 그 틈에 종아리를 물었다.
눈으로 재지 말고, 그림자 끝을 본다.
벽을 따라 늘어진 그림자가 어디서 끝나는지. 그 끝이 내가 나올 자리였다. 우두머리 쥐가 터널 끝 배수관 앞에 버티고 있었다. 송아지만 한 놈이었다. 놈의 등 뒤로 배수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두 번째. 그림자 끝을 봤다. 들어가.
슥.
배수관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놈의 바로 뒤였다.
퍽.
단검이 목덜미에 박혔다. 괴력을 실어서. 우두머리가 물속에 고꾸라졌다.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머리가 핑 돌았다. 마력이 쑥 빠져나간 감각.
한 번에 마력이 반은 빠진다. 하루에 두 번, 많아야 세 번. 쓸 자리를 골라야 하는 기술이었다.
【상태창】 【레벨 9 / 다음 레벨까지 89%】
7퍼센트. 하수 냄새를 몸에 감고 버스에 탔다. 아무도 내 옆에 앉지 않았다. 기사가 창문을 전부 열었다.
* * *
그날 저녁, 씻고 진료소에 갔다. 손에 귤 한 봉지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자 대기 의자의 할머니들이 일제히 나를 봤다.
"총각 또 왔네! 오늘은 어디 아파?"
"안 아파요."
귤 봉지를 내밀었다. 할머니들이 와 하고 받아 갔다. 하나는 내 볼을 꼬집었다.
진료실 커튼이 걷혔다. 예린이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어디 다치셨어요?"
"안 다쳤어요. 이거, 할머니들 드리라고요."
할머니들 손에 들린 귤을 보며 그녀가 웃었다.
"약손 값이에요?"
"비슷해요."
할머니들이 귤을 까며 저희끼리 떠드는 사이, 진료실 책상 위 메모지를 한 장 뜯었다. 번호를 적었다. 손이 떨려서 숫자 하나를 두 번 고쳐 썼다.
"무슨 일 있으면 밤이든 새벽이든 전화하세요."
그녀가 쪽지를 받았다. 숫자를 내려다보다가 나를 봤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세요?"
"빚이 있어서요."
"저한테요? 처음 뵙는데."
"그런 게 있어요."
그녀가 한참 나를 봤다. 처진 호박색 눈이 내 얼굴을 읽고 있었다. 거짓말을 찾는 눈이 아니었다. 다친 데를 찾는 눈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게 사람을 봤다.
그러고는 쪽지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손바닥으로 주머니를 한 번 꾹 눌렀다.
그 빚은 십 년 동안 갚지 못했다. 그녀의 떨리는 손으로 받은 치료가 몇 번이었는지 세다가 그만뒀다. 셀 수가 없어서.
* * *
4월 16일 밤. 남은 2일.
고시원 문을 열자 은빛 포니테일이 서 있었다. 제복 대신 검은 운동복 차림이었다. 허리에 칼을 차고.
"데려가기로 했잖아요."
"생각해 본다고 했죠."
"생각해 보셨잖아요. 사흘이나. 저 오늘 비번이에요. 일부러 바꿨어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회기동 언덕 아래, 철거된 옛 공동묘지 터. 땅속으로 열린 E급 게이트였다. 안은 끝없는 지하 묘지였다. 벽 곳곳에 횃불이 타고 있었다. 누가 붙였는지 모를 불. 벽감마다 해골이 누워 있다가 우리가 지나가면 일어났다.
윤하가 칼을 뽑았다. 손이 떨렸다. 서울역 때보다는 덜.
첫 해골 병사가 다가왔다. 그녀가 찔렀다. 정확했다. 칼끝이 해골의 갈비뼈 사이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멈췄다.
꽉.
칼이 갈비뼈에 끼었다.
"빠, 빠져라……!"
그녀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해골이 칼을 박은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녹슨 칼을 쳐들었다.
빠각.
괴력을 실은 발로 해골 무릎을 걷어찼다. 해골이 무너졌다. 그녀의 칼이 빠져나왔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하얬다.
"찌르기는 정확해요. 발이 늦어요."
"발이요?"
"찌르고 나서 빠지는 발. 칼이 들어간 순간 이미 뒤로 빠지고 있어야 해요. 칼은 뽑는 게 아니라 몸이 빠지면서 따라 나오는 거예요."
전생에 그녀가 나한테 가르쳐 준 말이었다. 7년 차에, 자기가 7년 걸려 깨달은 거라며. 지금 그 말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그녀가 칼끝을 내려다봤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발.
두 번째 해골. 그녀가 찔렀다. 칼끝이 갈비뼈 사이로 들어간 순간, 발이 먼저 뒤로 빠졌다. 칼이 따라 나왔다. 깨끗하게. 해골이 무너졌다.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눈이 반짝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앞을 봤다. 귀가 빨갰다.
가장 깊은 방에 녹슨 갑옷의 해골 기사가 있었다. 손에 쥔 장검만은 녹슬지 않았다. 칼날이 검었다. 빛을 먹는 것처럼.
정면으로는 무리였다. 놈의 칼은 내 단검보다 세 배 길었다.
벽의 횃불을 봤다. 횃불이 만든 그림자. 놈의 등 뒤까지 이어져 있다.
윤하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해골 기사 앞으로 나서며 칼을 겨눴다. 놈이 그녀를 봤다.
들어가.
횃불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놈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투구와 갑옷 사이, 목뼈 틈으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괴력으로 비틀었다.
딱.
두개골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갑옷이 무너지며 검은 장검이 내 발밑에 떨어졌다.
쓸 만하다.
주워 들었다. 무거웠다. 칼자루를 쥐자 손이 저절로 고쳐 잡았다. 이 손은 장검을 처음 쥐는데, 머리는 십 년을 쥐었다.
윤하가 내 손의 장검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거 들고 지하철 타면 신고당해요."
결국 그녀가 협회 장비 가방을 빌려 줬다. 반출 기록은 또 그녀 이름으로 남았다.
게이트를 나오자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그녀가 비틀거렸다. 긴장이 풀린 다리였다. 팔을 잡아 줬다. 괴력이 들어가지 않게 손가락 끝으로.
그녀가 내 팔에 기댄 채 몇 걸음을 걸었다. 놓지 않았다. 운동복 소매 너머로 체온이 건너왔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 높이에서 흔들렸다.
"이현 씨는 누구한테 배웠어요? 그 발 얘기."
"……아는 사람이요."
"그 사람 칼 잘 써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잘 써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지금 내 팔에 기대 있었다.
* * *
4월 18일. 남은 1일.
종로 폐건물 지하, 마지막 E급 게이트. 석판 골렘 셋. 검은 장검이 돌을 갈랐다. 괴력이 무게를 들고, 단검술이 손목을 이끌었다.
서걱.
마지막 골렘이 무너졌다.
【레벨 업】 【레벨 9 → 10】 【잠긴 기억 1을 엽니다】
눈앞이 하얘졌다.
* * *
전생, S급 헌터의 검.
7년 차 겨울, 한강 둔치. 부러진 장검을 만 번째 휘두르고 있었다. 숨이 하얗게 얼었다. 손바닥 굳은살이 터져 칼자루가 피로 미끄러웠다.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셋이었다. 소율이 보온병을 흔들었고, 예린이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내 어깨에 둘렀다. 윤하는 다리를 절며 내 옆에 서서 자기 칼을 같이 휘둘렀다.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달을 자르고 싶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것들 위로 매일 떠오르던 그 달을.
그날 처음으로 칼끝에서 빛이 떨어져 나갔다. 초승달 모양으로.
【봉인 해제】 【단월(斷月) 1식】 【초승달 모양의 보라 검기를 날린다】 【전생의 기억이 하나 돌아왔습니다】
이 감각. 기억난다.
【스킬 정보】 【단월 1식 / 하루 3번】 【대가 — 쓴 팔에 반동】 【검이 있어야 쓸 수 있다】
눈을 떴다. 지하 바닥이 차가웠다. 뺨이 젖어 있었다.
검은 장검을 들었다. 휘둘렀다.
칼끝에서 보랏빛이 피어오르다가 푸슥 흩어졌다. 반딧불이처럼.
몸이 기억을 못 따라온다.
벴다. 그래서 흩어졌다. 전생의 나는 베지 않았다. 한강 둔치에서, 그날 나는 달을 봤다.
베는 게 아니라, 달을 긋는다.
다시. 이번엔 앞의 벽을 보지 않았다. 천장 너머 보이지 않는 달을 봤다. 칼끝으로 그 달의 둥근 선을 따라 그었다.
칼끝에서 보랏빛 초승달이 떨어져 나갔다.
쉭.
맞은편 바위벽에 박혔다. 벽이 비스듬히 갈라지며 미끄러져 내렸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팔이 떨렸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저릿하게. 반동이었다. 하루 세 번이 한계다. 실패한 한 번도 센 모양이었다.
【안내】 【벽을 벤 것은】 【공략으로 치지 않습니다】
"……알아."
* * *
4월 18일 밤 11시 50분. 고시원.
검은 장검을 수건으로 닦았다. 칼날에 내 얼굴이 비쳤다. 스물다섯의 얼굴이었다.
전생에 들은 건 '7일째 실종됐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 3년에 대해 십 년 동안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묻지 않았다. 아프게 할까 봐.
7일째는 4월 19일이다. 내일 아침부터 곁을 지킨다. 진료소 문이 열릴 때부터 닫힐 때까지. 그래서 오늘은 일찍 자야 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손가락에 감은 테이프를 다시 감았다. 반동이 남은 오른팔이 아직 저렸다. 내일 단월은 세 번. 그림자 걸음은 두 번. 하진의 방패를 머릿속으로 수십 번 갈랐다.
0시 0분.
지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차예린.
"예린 씨?"
대답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숨소리. 여럿의.
느린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축복합니다."
뚝.
【숨겨진 퀘스트】 【차예린 — 남은 시간 0일】
7일째 아침이 아니었다. 7일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한 줄을 십 년 동안 외우고도 그걸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