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기억하는 헌터

11화 · 측정 불가

쾅.

수정이 터졌다. 붉은 보랏빛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속 원기둥 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측정대 뒤에 앉아 있던 오 팀장의 안경이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지도 않고 연기 나는 측정기를 봤다. 그다음 나를 봤다.

"F급이 측정기를……?"

천 명이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숨을 멈췄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설명하려면, 30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 * *

4월 20일, 삼성동 컨벤션 홀. 제1회 헌터 등급 측정회.

홀은 거대했다. 천장이 까마득했다. 바닥에 노란 선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대기석, 측정 구역, 결과 게시판. 각성자만 이천 명이 넘는다고 했다. 구경꾼과 기자까지 합치면 그 몇 배였다. 방송국 카메라가 홀 구석마다 서 있었다.

여드레 전까지 이 나라에 각성자는 없었다. 지금은 축제였다.

홀 한가운데 측정기 열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허리 높이의 금속 원기둥. 윗면에 주먹만 한 수정이 박혀 있었다.

윤하가 내 옆에서 설명했다. 협회 제복 차림이었다. 오늘은 근무였다.

"수정에 손을 대면 마력이 숫자로 나와요. 그 숫자로 F부터 S까지."

"알아요."

"……어떻게요?"

"……유튜브."

그녀가 나를 한참 봤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 대답을 이제 그만 믿기로 한 얼굴이었다.

전생의 나는 이 측정기 앞에서 F를 받았다. 수정이 손톱만큼 빛났다. 사람들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십 년 동안 기억했다.

예린이 번호표를 쥐고 있었다. 크림색 니트에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어제 윤하와 산 옷이었다.

"저도 받아 볼게요. 등록돼 있으면 협회가 지켜 준대서요."

그녀가 웃었다. 그런데 번호표를 쥔 손가락이 하얬다. 사람 많은 곳에서 그녀는 계속 주위를 살폈다. 흰 후드를 찾는 눈이었다.

윤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 없이. 근무 중인 협회 요원이 할 일은 아니었다. 윤하는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 예린이 놀라서 윤하를 봤다. 윤하는 앞만 보고 있었다. 귀만 빨갰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대기석 의자는 딱딱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을 자랑했다. 손에서 불꽃이 튄다는 사람, 물건이 저절로 떠오른다는 사람, 밤눈이 고양이처럼 밝아졌다는 사람. 다들 들떠 있었다. 아무도 10년 뒤를 몰랐다.

그 얼굴들을 하나씩 봤다. 전생의 이 홀에 있던 사람 중 2035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저 불꽃 튀는 손도, 떠오르는 물건도, 고양이 같은 밤눈도. 그 생각을 하다 그만뒀다. 이번엔 다르게 만들러 왔다.

윤하가 근무 틈에 김밥 두 줄을 들고 왔다. 예린 몫과 내 몫이었다. 자기 것은 없었다.

"윤하 씨는요?"

"저는 먹었어요."

거짓말이었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배를 눌렀다. 예린이 말없이 자기 김밥 반 줄을 은박지째 그녀 손에 쥐여 줬다. 윤하가 받으면서 고맙다고 했다. 둘이 서로를 보고 조금 웃었다.

* * *

계획은 간단했다.

괴력은 손끝에서 빼고, 마력은 숨 참듯 누른다. F급이 나오게.

레벨 14. 스킬이 다섯. 이 세상에서 각성자는 스킬을 하나 받는다. 측정기가 스킬까지 잰다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흰빛만 나오면 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등급.

"다음."

측정 구역에 들어섰다. 측정기 옆에 기록원 하나, 그 뒤 의자에 남자 하나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짧은 회색 머리, 은테 안경, 사흘은 못 잔 얼굴. 검은 협회 정장의 넥타이가 반쯤 풀려 있었다. 종이컵 커피를 쥐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만 듣던 목소리의 얼굴이었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네가 그놈이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말투는 멀쩡하네."

그가 턱으로 측정기를 가리켰다. 윤하가 측정 구역 밖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협회 측정】 【수정에 손을 대십시오】 【측정 대상 — 강이현】

측정기 화면에 창이 떴다. 기록자의 창이 아니었다. 협회 기계의 화면이었다. 그런데 모양이 똑같았다. 이상했다. 그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살살. 아주 살살.

손가락 끝을 수정에 댔다. 괴력은 손목에서 끊었다. 마력은 배 속 깊이 눌러 두었다. 숨을 참았다.

수정이 희미하게 빛났다. 흰빛. 됐다.

그때 손바닥이 뛰었다.

두근.

손바닥 한가운데, 붉은 자국이. 심장처럼. 수정에 닿은 건 손가락 끝뿐이었는데, 자국이 수정을 부르는 것 같았다.

……어?

수정 안의 흰빛이 흔들렸다. 붉은빛이 섞여 들었다. 보랏빛으로 변했다. 점점 짙어졌다. 붉은 보라. 수정 표면에 금이 갔다. 실금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손을 떼려고 했다.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정이 붙잡고 있었다.

쾅.

* * *

연기가 걷혔다.

측정기 원기둥 윗부분이 꽃잎처럼 벌어져 있었다. 수정은 형체도 없었다. 바닥에 붉은 보라색 파편이 흩어져 반짝였다.

오 팀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아주 천천히.

"이거 얼마짜리인지 알아?"

"살살 잡았는데요."

진심이었다. 손가락 끝만 댔다. 괴력은 하나도 안 썼다. 그런데 손바닥의 붉은 자국이 아직 뛰고 있었다.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군주의 조각을 쥐었던 자리. 그게 수정에 반응했다. 왜인지는 나도 몰랐다.

측정기 옆 작은 화면이 깜빡이더니 글자를 띄웠다.

【헌터 등급】 【강이현 — F급】 【비고 — 측정 불가(기기 파손)】

홀이 술렁였다.

"F급이 측정기를 부쉈다고?"

"그럼 F급이 아니잖아."

"손만 댔는데 터졌어. 내가 봤어."

"저 사람, 슬리퍼 청년 아니야?"

휴대폰 카메라가 몇 개 올라왔다. 측정 구역 밖에서 윤하가 이마를 짚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니까 못 도와드린다고.

오 팀장이 기록원 어깨를 두드렸다.

"기록해. 그대로."

"수, 수리비는요?"

"협회가 낸다. 내가 무슨 죄냐. 아니, 저놈이 낸다고 적어."

* * *

예린 차례였다.

그녀가 측정기 앞에 섰다. 새 측정기였다. 내가 부순 건 치워졌다. 그녀가 모자를 벗었다. 꿀빛 금발이 쏟아졌다. 손바닥을 수정에 얹었다.

수정 안에서 금빛이 피어올랐다. 꿀을 녹인 것 같은 빛. 점점 밝아졌다. 홀 천장까지 금빛이 번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헌터 등급】 【차예린 — B급 치유사】

"B……급이요?"

예린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 팀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치유 B급이면 길드들이 줄 선다. 조심해."

예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하얀 방이 떠오른 얼굴이었다. 윤하가 그녀 옆에 섰다.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붙였다.

* * *

홀 2층 계단에서 누가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절로 길을 비켰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흰 정장. 뒤로 넘긴 회금발. 금색 눈. 얇은 미소. 그 뒤로 정장 입은 남자 둘이 한 발짝 떨어져 따랐다.

백건우. 백광 길드 길드장.

서른두 살의 그는 2035년보다 젊었다. 눈가에 주름이 없었다. 그런데 웃는 입 모양은 똑같았다. 건우 형, 하고 부르면 돌아보던 그 입.

그가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참아라. 지금은 아니다.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괴력이 손끝까지 차올랐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붉은 자국 바로 옆이었다.

"재밌는 친구군."

그가 부서진 측정기 파편을 구두 끝으로 툭 건드렸다.

"측정기를 부순 F급이라. 우리 길드로 오지 않겠나."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깨끗한 손. 2035년, 칼날을 손수건으로 닦던 손.

예린이 내 뒤에서 숨을 죽였다. 그녀는 이 사람을 모른다. 그런데 내 등이 굳은 걸 봤다.

손을 잡았다.

잡는 순간 괴력이 손끝까지 차올랐다. 조절하지 않았다. 고시원 난간을 휜 힘, 오우거의 괴력. 그 이상.

뼈가 으스러져야 했다.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가웠다. 쇠를 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내 손을 마주 쥐었다. 가볍게. 그런데 손가락뼈가 삐걱거렸다.

"악력이 좋군."

"사양할게요. 백수가 편해서요."

그가 웃었다. 손을 놓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왔다. 내 귀에 입을 댔다. 비싼 향수 냄새가 났다.

"하진은 좋은 사제였는데."

숨이 멎었다.

그가 손을 놓았다. 손수건을 꺼내 자기 손바닥을 닦았다. 천천히, 손가락 사이까지. 2035년과 똑같은 손짓이었다.

"또 보지."

그가 돌아서 걸어갔다. 흰 정장이 군중 사이로 사라졌다.

【경고】 【대상 — 백건우】 【레벨 측정 불가】 【회수 가능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레벨 차이 서른 이상. 지금 붙으면 죽는다.

전생의 나는 S급이 되고도 그를 이길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등을 맡겼다. 지금의 나는 레벨 14였다.

그리고 그는 하진을 알았다. 좋은 사제였다고, 내 귀에 대고 말했다. 하진을 안다는 걸, 하진이 어떻게 죽었는지 안다는 걸, 그는 숨기지도 않았다.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이. 내가 알아도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게 제일 화가 났다.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아팠다.

* * *

손이 떨렸다. 괴력 때문이 아니었다.

예린이 내 손을 잡았다. 마주 쥐느라 빨갛게 된 손가락을 하나씩 감쌌다. 금빛은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었으니까. 그냥 잡았다.

"손, 아프죠."

"괜찮아요."

그녀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도 빼지 않았다. 그가 닦아 낸 손바닥 위로 그녀의 온기가 천천히 덮였다.

윤하가 백건우가 사라진 쪽을 보고 있었다. 얼음색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저 사람, 아는 사람이에요?"

"……아직은 모르는 사람이요."

아직은. 그녀가 그 단어를 곱씹는 게 보였다. 더 묻지 않았다.

* * *

그때 홀 반대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비명. 그리고 보랏빛이 번쩍였다. 번개였다. 실내에서, 사람들 머리 위로. 내 칼끝의 보라보다 붉은 보라.

사람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측정기 앞에 혼자 서 있었다. 짙은 보라색 롱코트. 허리까지 내려오는 곧은 흑발이 정전기에 떠올라 있었다. 일자 앞머리 아래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보라색 눈.

두 손에서 번개가 쉬지 않고 튀고 있었다.

소율……?

천장 조명이 하나씩 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