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꿈에 나와요.
그 말이 밤새 귓가에 남았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봤다. 침대에서 예린이 고른 숨을 쉬었고, 문 옆에서 윤하가 침낭에 웅크려 잠꼬대를 했다. 시말서 셋째 장, 하고.
전생의 소율은 꿈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꿈을 꾸긴 했을까. 그런 것도 나는 묻지 않았다.
아침에 예린이 먼저 일어나 공용 주방에서 밥을 지었다. 고시원 공용 밥솥은 늘 비어 있었는데, 그날은 김이 올랐다. 그녀가 내 컵라면 탑을 보더니 한숨을 쉬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짰다. 윤하는 침낭에서 나오자마자 그걸 두 그릇 먹고 출근했다. 짜다는 말은 안 했다. 물을 세 컵 마셨을 뿐이다.
* * *
다음 날 아침. 4월 21일.
편의점에 우유를 사러 나섰다. 고시원 골목을 나서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전봇대 뒤였다.
전봇대는 사람 하나를 가리기엔 너무 가늘었다. 그녀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알면서도 거기 서 있었다. 짙은 보라색 롱코트 자락이 양쪽으로 다 삐져나와 있었다. 일자 앞머리 아래 고양이 같은 눈이 전봇대 옆으로 빼꼼 나를 보고 있었다.
멈춰 서서 봤다. 눈이 쏙 들어갔다. 코트 자락은 그대로였다.
"……다 보여요."
대답이 없었다. 코트 자락이 아주 조금 안쪽으로 당겨졌다. 더 가려질 리가 없었다.
그냥 걸었다.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으면서.
열 걸음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멈췄다. 발소리도 멈췄다. 돌아봤다. 그녀가 길 한가운데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다시 걸었다. 발소리가 따라왔다.
편의점에 들어갔다. 우유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 딸랑, 문이 열렸다. 그녀가 들어와 내 뒤에 섰다. 계산대 직원이 그녀를 봤다.
"……같은 걸로."
직원이 우유를 하나 더 꺼냈다. 그녀가 카드를 내밀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보지 않은 척했다.
전생의 소율도 이랬다. 처음 3년은 나한테 눈도 안 맞췄다. 그러면서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우연이라고 우기면서.
* * *
공원 벤치는 길었다. 칠이 벗겨진 초록색 나무 벤치였다. 그녀가 한쪽 끝에, 내가 반대쪽 끝에 앉았다. 사이에 사람 셋은 앉을 만했다.
그녀가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한 모금 마셨다. 한참 말이 없었다. 비둘기가 우리 사이를 걸어 다녔다.
"꿈 얘기예요."
그녀가 비둘기를 보며 말했다.
"이상한 사람 취급하면 바로 갈 거예요."
"……들을게요."
그녀가 빨대를 깨물었다.
"석 달 전부터요. 무너진 도시, 빨간 하늘."
손이 굳었다. 우유팩이 손 안에서 찌그러졌다. 괴력을 뺐다.
"거기서 어떤 남자가 맨날 숨을 세 줘요. 내가 숨이 막히면. 하나, 둘."
그녀가 숫자를 셀 때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 번 두드렸다.
"꿈속 도시엔 사람이 없어요. 그 남자랑 나랑, 그리고 여자 둘이 더 있는데 얼굴은 안 보여요. 다들 그 남자 등만 봐요. 근데 그 남자는 맨날 혼자 앞에 서려고 해요. 그게 꿈속에서도 짜증 나요."
그녀가 우유를 쭉 빨았다. 빈 팩이 쪼그라드는 소리가 났다.
"얼굴은 흐린데. 등이랑, 목소리랑, 손은 또렷해요. 어제 알았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보라색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눈 밑이 거뭇했다. 석 달 동안 제대로 못 잔 얼굴이었다. 그래도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계산을 끝낸 사람의 눈이었다.
"당신이에요."
전생의 기억이…… 꿈으로 새고 있다.
내 손바닥의 붉은 자국. 측정기를 터뜨린 그것. 무언가가 나를 따라 이 시간으로 넘어왔다. 그 무언가의 냄새를 그녀가 맡고 있었다. 꿈속에서.
"닮은 사람이겠죠."
"닮은 사람이 숨을 똑같이 세요?"
그녀가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몸을 반쯤 내 쪽으로 돌렸다.
"둘에서 한 번 쉬고."
숨이 멎었다.
내 버릇이다.
그녀가 숨이 막힐 때, 둘에서 기다려 줘야 따라왔다. 그래서 둘에서 한 번 쉬었다. 십 년 동안. 그게 버릇이 됐다. 그 버릇을 그녀가 꿈에서 듣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을 기다렸다. 진짜 대답을. 숨기지 말고.
말할 수 있었다. 십 년을 같이 싸웠다고. 네가 마지막에 내 앞에 서서 죽었다고. 그래서 지금 네 얼굴을 보면 숨이 막힌다고.
그런데 2035년의 옥상이 떠올랐다. 마지막이니까 아끼지 말자, 하고 하늘로 손을 뻗던 그녀. 망가졌다던 번개를 십 년 만에 다 쏟아 낸 그녀. 나 때문에.
가까이 두면, 또 나를 지키다 죽는다.
"꿈은 꿈이에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게 나갔다. 일부러였다.
"측정기 근처엔 가지 마세요. 금속 많은 데도요."
그녀가 나를 한참 봤다. 그러고는 우유팩을 구겨 벤치 옆 쓰레기통에 던졌다. 정확히 들어갔다.
"……재수 없어."
혼잣말처럼 말하고 일어섰다.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갔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그게 낫다.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괴력도 안 썼는데.
벤치에 혼자 남아 한참 앉아 있었다. 비둘기가 그녀가 앉았던 자리로 걸어왔다. 거기 떨어진 빨대 껍질을 쪼았다.
전생에 나는 셋 모두에게 이렇게 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셋은 한 번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내 앞에 섰다. 이번엔 듣게 만들 수 있을까. 그녀의 뒷모습이 공원 입구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그날 오후, 고시원 계단을 올라오는데 위층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제 그분이죠?"
예린의 목소리였다.
"……아니요."
소율이었다.
계단참에서 멈춰 섰다. 위를 올려다봤다. 고시원 3층 복도 끝, 내 방 문 앞에 소율이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려 있었다. 그 앞에 장바구니를 든 예린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떡볶이 좋아하세요?"
소율이 고개를 들었다. 장바구니에서 떡과 어묵이 보였다.
"……."
대답 대신 배에서 소리가 났다. 소율이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예린이 웃었다. 볼에 보조개가 파였다.
* * *
방에 들어서자 이미 셋이었다.
예린이 침대 끝에 앉아 냄비를 무릎에 받치고 있었다. 공용 주방에서 만든 떡볶이였다. 빨간 국물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소율이 그 옆에 앉아 포크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문 옆 침낭 위에 윤하가 앉아 있었다. 제복 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윤하가 소율을 보고 있었다. 얼음색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이분은 왜 여기 있어요?"
소율이 떡을 입에 문 채로 받아쳤다.
"그쪽은 왜 여기 있는데요?"
"저는 감시 중이에요. 협회 지시예요."
소율의 시선이 윤하 엉덩이 밑의 침낭으로, 문 옆에 쌓인 칫솔과 수건과 갈아입을 옷으로 옮겨 갔다.
"……협회는 감시를 짐 싸 들고 해요?"
윤하의 귀가 빨개졌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예린이 냄비를 가운데로 밀었다.
"같이 드세요. 많이 했어요."
"……."
"……."
둘이 동시에 포크를 들었다. 같은 떡을 찍었다. 서로를 봤다. 동시에 놓았다. 예린이 그 떡을 집어 내 입에 넣어 줬다.
쾅.
벽이 울렸다.
"이젠 넷이냐!!"
옆방 아저씨였다. 셋이 동시에 나를 봤다.
"……세 명이요. 제 방에 세 명."
"그게 더 이상하잖아!!"
방이 좁았다. 소율은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 내 옆 바닥에 털썩 앉았다. 어깨가 닿았다. 코트를 벗은 그녀의 얇은 니트 소매가 내 팔에 붙었다. 번개 쓰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났다. 비 오기 전 공기 냄새. 윤하의 포크가 떡을 찍다 말고 멈췄다. 예린은 웃으며 냄비를 소율 쪽으로 조금 밀어 줬다.
소율이 입을 막았다. 어깨가 떨렸다. 웃음을 참는 거였다. 처음 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윤하가 그걸 보고, 예린을 보고, 결국 자기도 웃었다.
* * *
떡볶이가 반쯤 줄었을 때 예린이 소율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요즘 잠 못 주무시죠? 눈 밑이요."
소율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꿈 때문에. 학교도 휴학했고."
"무슨 과요?"
"물리학과. 3학년."
전생에도 그녀는 숫자에 강했다. 계산해 봤는데, 하고 말을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학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휴학한 채로 탑에 갇혔으니까.
윤하가 팔짱을 풀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폭주 겪은 사람은 협회 상담 받을 수 있어요. 비용 안 들어요. 제가 연결해 드릴게요."
소율이 둘을 번갈아 봤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다들 왜 이렇게 친절해요? 처음 보는데."
예린이 나를 힐끗 봤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소율에게 웃었다.
"그러게요. 다들 처음 보는데."
모닥불 앞의 셋. 그 자리에, 다시.
2035년 마지막 밤, 소율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웠고 예린은 내 손을 잡았고 윤하는 내 어깨에 기댔다. 지금 셋은 한 평 반짜리 방에서 떡볶이 냄비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서로 처음 보는 얼굴로.
목이 막혀서 창밖을 봤다. 공책만 한 창이었다.
* * *
밤 열 시. 소율을 골목 끝까지 배웅했다. 예린이 시켰다. 윤하는 따라 나오려다 예린에게 소매를 잡혔다.
"윤하 씨는 설거지요."
"제가요? 왜요?"
"떡 제일 많이 드셨잖아요."
윤하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예린이 나를 보고 눈을 찡긋했다.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니, 알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
소율이 가로등 아래서 돌아섰다.
"내일도 올 거예요."
"……."
"꿈 때문이 아니라 떡볶이 때문에."
"……오지 마요."
"그쪽 집 아니잖아요. 저 언니들 보러 오는 거예요."
"언니들이요?"
"금발 언니가 떡볶이 또 해 준대요. 은발 언니는 상담 연결해 준대요. 그쪽은 아무것도 안 해 줬잖아요."
숨을 세 줬잖아요,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삼켰다.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돌아서 걸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은 채.
다섯 걸음쯤 갔을 때 그녀의 머리 위 가로등이 깜빡였다.
지직.
그녀가 멈췄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손끝에서 붉은 보라색 불꽃이 톡, 톡 튀고 있었다. 작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음 가로등이 깜빡였다. 그다음 가로등도. 골목을 따라 하나씩.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그녀보다 먼저.
그녀가 손을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번개가 새어 나왔다. 쥘수록 더 많이.
폭주는 끝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