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오지 말라고 해 놓고, 골목 모퉁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섯 걸음을 가는 동안. 가로등이 하나씩 깜빡이는 동안.
뛰어나갔다.
가까이 두면 안 된다고, 아침에 그렇게 다짐했다. 오지 말라고 했고, 재수 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런데 가로등이 깜빡이는 걸 보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머리가 다짐한 걸 몸이 듣지 않았다. 레벨 1의 몸이 겁을 먹었던 것처럼, 이번엔 반대로.
* * *
밤 11시 12분. 골목 끝 작은 공원.
그녀가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라색 빛이 새어 나왔다. 벤치 옆 가로등이 지직거리며 깜빡였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오지 말라면서요."
"지나가던 길이에요."
"백수가 밤 열한 시에?"
대답하지 않았다. 벤치 반대쪽 끝에 앉았다. 아침처럼, 사이에 사람 셋을 두고. 아침과 같은 벤치였다. 칠이 벗겨진 초록 나무. 그녀가 아침에 우유팩을 던져 넣은 쓰레기통이 옆에 있었다.
그녀의 숨이 얕았다. 빠르게, 짧게. 목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측정회 때와 같은 소리였다. 아직 폭주까지는 아니었다. 그 직전이었다.
거리를 둔 채로 말했다.
"숨. 같이 세요."
그녀가 나를 봤다. 의심하는 눈이었다. 그러다 무릎 사이의 손이 더 밝아졌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둘에서 한 번 쉬었다.
그녀가 따라 내쉬었다. 떨리면서.
"……셋."
그녀가 먼저 셌다. 내가 셋은 세지 않았는데. 하나, 둘, 셋. 그녀만의 숫자였다.
다시. 하나, 둘. 그녀가 셋.
가로등의 지직거림이 잦아들었다. 손가락 사이의 보랏빛이 희미해졌다. 그녀가 손을 펴 봤다. 불꽃이 튀지 않았다.
한참 둘 다 말이 없었다. 밤바람이 공원 나무를 흔들었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울었다.
"왜 셋은 안 세요?"
그녀가 물었다.
"둘까지만 세면 돼요. 셋은 그쪽이 세면 되니까."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코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이었다.
"꿈속 사람도 그랬어요. 셋은 꼭 나한테 시켰어요. 그래서 꿈에서 깨면 혼자 셋을 세요. 그럼 다시 잠이 와요."
전생의 그녀도 그랬다. 둘까지는 내가, 셋은 그녀가. 그게 우리 둘만의 약속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엄마가 그렇게 해 줬어요. 어릴 때 천식이 있었거든요. 숨 막히면 엄마가 둘까지 세고, 셋은 내가."
그녀가 손을 쥐었다 폈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무도 안 세 줬어요. 근데 석 달 전부터 꿈에서 누가 세 주더라고요."
"꿈에서요."
그녀가 손바닥을 내려다본 채 말했다.
"나…… 죽어요?"
목이 막혔다.
2035년 옥상이 떠올랐다. 마지막이니까 아끼지 말자. 하늘을 가르던 보라색 기둥. 빛이 걷힌 뒤 바닥에 남은 녹아 붙은 장갑 한 짝.
"……아뇨."
그녀가 나를 봤다. 오래.
"꿈속 당신도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녀가 일어섰다. 코트 자락을 털었다.
"같은 얼굴로."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나를 내려다봤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다 안다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쓸쓸한 얼굴이었다.
"됐어요. 데려다주지 마요."
몇 걸음 가다 멈췄다.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고마워요. 숨."
그녀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가로등이 깜빡이지 않았다. 오늘 밤은. 그녀가 걸어간 쪽에서 아주 작게, 셋,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 *
벤치에 혼자 남았다. 허공에 대고 물었다.
"기록자. 소율이 남은 시간, 정확히 뭐야."
창이 떴다.
【안내】 【한소율 — 남은 시간 21일】 【원인 — 마력 폭주 누적】
"누적?"
【안내】 【폭주가 세 번 겹치면】 【마력이 스스로 문을 엽니다】
"문……. 게이트를?"
【안내】 【공간 계열 각성자의 폭주는】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게이트가 됩니다】 【현재 누적 2회】
두 번. 측정회, 그리고 오늘 밤 골목.
방금 벤치에서 세 번째가 될 뻔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안내】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적인 놈.
"그럼 지금 묻는다. 막을 방법은."
창이 한참 비어 있었다. 기록자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안내】 【폭주의 원인은 넘치는 마력입니다】 【넘치기 전에 흘려 보내는 법을 아는 자가 곁에 있다면】
문장이 거기서 끊겼다. 다음 줄은 뜨지 않았다. 끝까지 말해 주지 않는 것도 사무적이었다.
* * *
벤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밤하늘을 봤다. 별이 몇 개 보였다. 머릿속으로 전생을 펼쳤다.
전생, 2025년 5월 12일 뉴스.
나는 그 뉴스를 고시원 방에서 봤다. 컵라면을 먹으면서. 잠실 상공에 정체불명의 탑. 높이 300미터. 꼭대기가 구름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탑 주변으로 사흘 내내 번개가 쳤다. 앵커가 말했다. 내부에 민간인 1명이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때는 남의 일이었다. 젓가락을 들고 채널을 돌렸다.
폭풍의 탑. 그건, 소율이 연 문이었다.
1년 뒤, 구조대가 탑에 들어갔다. 나도 그 구조대에 있었다. F급 짐꾼으로. 탑 꼭대기에서 그녀를 찾았다. 웅크린 채 혼자 숨을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꺼냈을 때 그녀의 번개는 망가져 있었다. 1년 동안 자기를 가둔 자기 번개와 싸운 대가였다.
그날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봤다. 늦었네, 하고. 그리고 십 년을 같이 싸웠다. 망가진 번개로.
그 1년 동안 그녀는 탑 안에서 혼자 숨을 셌다. 둘까지 세 줄 사람이 없어서, 하나부터 셋까지 혼자. 구조대가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셋을 세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셋을.
나는 그 숫자를 십 년 동안 잊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숨이 막힐 때마다 둘까지 셌다. 셋은 꼭 그녀에게 남겨 두고.
5월 12일.
그 전에 세 번째를 막거나,
그날, 같이 들어간다.
【안내】 【폭풍의 탑 — 권장 레벨 25】 【현재 레벨 14】
"열하나 남았네."
21일 동안 열하나. 레벨 20을 넘으면 한 레벨 올리는 데도 며칠이 걸린다. 전생의 나는 레벨 14에서 25까지 2년이 걸렸다.
【안내】 【참고로】 【하루에 0.5레벨씩 올리셔야 합니다】
"……계산하지 마."
기록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이 맞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에 목록을 펼쳤다. 전생 첫해의 게이트들. 서울 안,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내 손으로 닫을 수 있는 등급. 하루에 둘, 많으면 셋. 단월 세 번, 그림자 걸음 두 번, 방벽 몇 번. 마력이 바닥나면 하룻밤 자고 다시.
돈도 문제였다. 통장에 이만 원. 장비도, 약도, 버스비도. 오늘 저녁 떡볶이는 예린이 샀다. 윤하의 빚 장부는 이미 두 장째였다.
그래도 해야 했다. 전생의 나는 레벨 25까지 2년이 걸렸다. 그 2년 동안 그녀는 탑 안에 있었다.
* * *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우유 두 개를 샀다. 하나는 내일 아침 윤하 몫이었다. 계산하다 보니 통장 잔고 알림이 떴다. 만 구천 원. 우유 하나를 도로 내려놓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니 방 불이 켜져 있었다. 예린은 잠들어 있었고, 윤하가 침낭 위에 앉아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그녀가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조용히.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피곤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 오 팀장이었다.
"……각성 기록도 없는 놈이 첫날부터 오우거를 잡았다고? 고시원 2년, 무직, 병원 기록도 감기뿐이야. 그런데 네 일지에 이게 왜 있어."
윤하가 침을 삼켰다.
"4월 13일, 22시 2분, 을지로 E급. 사전 제보, 강이현."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자기 일지였다. 거짓말을 못 쓰는 사람이라 그렇게 적었을 것이다. 사전 제보.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알았다고? 서윤하.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
"됐다. 너한테 안 묻는다."
수화기 너머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났다.
"서윤하. 그놈 사는 데, 주소 불러."
윤하가 나를 봤다. 얼음색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해요, 하고 묻는 눈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 줘요. 어차피 알게 된다. CCTV로 슬리퍼를 따라온 사람이 그녀였다. 그녀의 상사가 못 찾을 리 없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주소를 불렀다. 전화가 끊겼다.
"죄송해요. 일지에,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괜찮아요. 거짓말 안 써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나를 봤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거짓말을 못 쓰는 사람이라서 내가 그녀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말하지 않았다.
팀장님이 직접 오실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분 원래 그래요. 서류로 안 믿고 직접 봐요.
그녀가 침낭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방 불을 껐다. 예린의 고른 숨소리만 남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작게 말했다.
"이현 씨. 저 이현 씨 편 맞죠?"
"……네."
"그럼 됐어요."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바닥에 나란히 앉은 채로. 얼마 안 가 숨이 고르게 바뀌었다. 잠든 것이다. 하루 종일 근무하고, 시말서를 쓰고, 상사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깰까 봐.
* * *
윤하가 잠든 뒤 옥상에 올라갔다.
빨래 건조대와 실외기 사이에 섰다. 동쪽, 잠실 쪽 하늘을 봤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 구름 속에서 이따금 보랏빛이 번쩍였다. 천둥소리는 없었다. 번개만.
소율의 번개 색이었다. 내 칼끝의 보라보다 붉은 보라. 십 년 동안 내 등 뒤를 밝히던 색.
번쩍. 구름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구름 아래로 무언가가 비쳤다. 길고 검은 것. 첨탑 모양의 그림자.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번쩍임이 사라지자 그림자도 사라졌다. 하늘엔 구름뿐이었다.
다시 번쩍. 다시 그림자.
……벌써 그림자가.
손바닥의 붉은 자국이 뛰었다. 두근, 두근. 번개가 칠 때마다 같은 박자로.
21일. 레벨 열하나. 그리고 세 번째 폭주.
이번엔 탑 밖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1년 뒤에 꺼내지 않는다. 그 전에 막거나, 막지 못하면 그날 같이 들어가서 둘까지 센다. 셋은 그녀가 세게.
아직 없는 탑이, 하늘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