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그림자는 새벽까지 구름 속에서 깜빡였다.
옥상 난간에 기대 해가 뜰 때까지 서 있었다. 첫 햇살이 잠실 쪽 구름에 닿자 보랏빛이 사라졌다. 그림자도 함께.
밤새 같은 생각을 했다.
가까이 두면 또 나를 지키다 죽는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다. 재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젯밤 벤치에서 그녀는 세 번째 폭주 직전까지 갔다. 내가 숨을 세지 않았다면 지금 잠실 하늘엔 그림자가 아니라 탑이 서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를 막으려면,
거리를 둘 수가 없다.
* * *
4월 22일. 한소율 남은 시간 20일.
어젯밤 그녀가 사라진 골목 끝 다세대 주택. 3층 창문에 보라색 커튼이 걸려 있었다. 협회 상담 연결 서류에 적힌 주소였다. 윤하가 어젯밤 침낭 속에서 웅얼거리며 알려 줬다. 개인 정보라 원래는 안 되는데,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뒤 인터폰 너머에서 잠긴 목소리가 났다.
"……누구."
"강이현이요."
정적. 그리고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보라색 롱코트를 대충 걸치고. 일자 앞머리가 뻗쳐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
"숨 세는 법, 혼자 할 수 있게 알려 줄게요."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거기까지만."
"……오지 말라면서요."
"계획이 바뀌었어요."
그녀가 나를 한참 봤다. 위아래로. 검은 후드 점퍼, 등에 멘 장비 가방. 가방 지퍼 틈으로 검은 칼자루가 비죽 나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로 돌아왔다. 어젯밤 벤치에서 본 얼굴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둘에서 한 번 쉬던 사람의 얼굴.
"……5분. 신발만 신고요."
문이 닫혔다. 3분 만에 다시 열렸다. 잠옷 바지 위에 코트, 운동화 끈은 안 묶은 채였다. 머리는 그대로 뻗쳐 있었다.
* * *
E급 게이트. 안개 숲.
마포 공원 산책로 끝, 아무도 모르는 게이트였다. 전생 기록엔 사흘 뒤 산책하던 노부부가 발견했다고 적혀 있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안은 하얀 안개가 무릎까지 깔린 숲이었다. 나무들이 이상하게 곧았다. 축축한 흙냄새와 이끼 냄새. 멀리서 늑대 우는 소리가 났다.
"여기서 뭐 하는데요."
"번개 쏘는 연습이요."
"미쳤어요? 측정회 봤잖아요."
"봤어요.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여긴 사람이 없어요. 터져도 나무만 쓰러져요."
전생에 그녀가 탑에서 나온 뒤 혼자 배운 것. 10년 동안 그녀가 망가진 번개로 버티던 방법. 그녀가 나한테 딱 한 번 설명해 줬다. 술 마신 밤에, 손을 쥐었다 펴면서.
"번개는 참으면 터져요. 조금씩, 흘려 보내요."
"조금씩이 어떻게 되는데……!"
안개 속에서 늑대가 나타났다. 회색 털, 빨간 눈. 셋, 넷.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손가락 사이로 보랏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손을 꽉 쥐었다.
참았다. 참고, 참고.
번쩍.
손바닥에서 번개가 한꺼번에 터졌다. 사방으로. 나무 세 그루가 쪼개졌다. 그중 하나가 우리 머리 위로 기울었다. 그녀를 끌어안고 굴렀다. 콰앙. 나무가 방금 서 있던 자리에 쓰러졌다. 안개가 흩어졌다.
그녀가 내 품 안에서 숨을 못 쉬었다. 목을 움켜쥐었다.
"하나, 둘."
둘에서 한 번 쉬었다.
"……셋."
그녀가 셌다. 숨이 돌아왔다. 그녀가 내 점퍼 앞섶을 쥔 채 헐떡였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가 내 품 안에 있었다. 안개 속에서, 쓰러진 나무 옆에서. 잠옷 위에 걸친 코트가 흘러내려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얇은 잠옷 너머로 그녀의 심장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빠르게. 숨이 돌아오면서 그녀의 숨결이 내 목에 닿았다. 뜨거웠다.
"……방금 거, 세지 마요."
"뭘요?"
"실패한 거요. 세지 말라고요."
귀가 빨갰다. 실패해서인지, 안겨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 * *
두 번째.
늑대 한 마리가 안개를 헤치고 다가왔다. 그녀가 일어섰다.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이 떨렸다.
"쥐지 마요. 펴요. 손끝으로."
그녀가 손을 폈다.
"저 한 마리만. 다른 데는 보지 말고."
그녀가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지 않고 내쉬었다. 손끝에서 보랏빛이 피어났다. 아주 조금. 실처럼.
"손끝으로. 저 한 마리만."
파직.
가는 번개 한 줄기가 손끝을 떠났다. 안개를 가르며 똑바로 날아갔다. 늑대의 미간에 꽂혔다. 정확히.
늑대가 쓰러졌다. 나무는 하나도 안 쓰러졌다.
그녀가 자기 손끝을 내려다봤다.
"……됐다?"
목소리가 떨렸다. 웃음이 섞여 있었다.
나머지는 둘이서 정리했다. 처음엔 그녀가 겨누는 동안 내가 기다렸다. 나중엔 그녀가 먼저 말했다. 왼쪽 거 내가. 오른쪽 거 당신이. 전생에 듣던 그 말투였다. 대장 소리만 빠졌을 뿐. 그녀가 손끝으로 한 마리씩 겨누면, 그 틈에 내가 옆으로 돌았다. 서걱. 파직. 서걱. 안개 숲에서 늑대 우는 소리가 하나씩 멎었다.
【레벨 업】 【레벨 14 → 15】
게이트 핵을 깨고 나오니 해가 중천이었다. 공원 벤치에 둘이 앉았다. 그녀가 자기 손끝을 몇 번이나 폈다 쥐었다.
그녀가 코트 주머니에서 사탕 두 개를 꺼냈다. 하나를 내 무릎에 툭 던졌다. 포도 맛이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인 모양이었다. 십 년 전에도 그녀는 고마울 때 말 대신 뭘 던졌다. 대개는 먹을 것이었다.
"이제 혼자서도 세 봐요."
그녀가 손을 멈췄다. 나를 봤다. 눈 밑의 그늘이 아침보다 옅어 보였다.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둘에서 한 번 쉬는 거, 그거 당신 버릇이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대답을 안 해도 된다는 웃음이었다.
* * *
오후 세 시, 고시원 계단을 올라오는데 3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누구 찾으세요?"
예린이었다.
계단참에서 올려다봤다. 내 방 문 앞에 검은 정장이 서 있었다. 짧은 회색 머리, 은테 안경. 문을 연 건 예린이었다. 크림색 니트에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설거지 중이었던 모양이다.
방 안쪽에서 윤하가 침낭 위에 앉아 시말서를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티, 팀장님……!"
오 팀장이 예린을 봤다. 고무장갑을 봤다. 방 안의 윤하를 봤다. 문 옆에 쌓인 칫솔 셋, 수건 셋, 침낭 하나.
"……감시?"
윤하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쾅.
옆방 벽이 울렸다.
"누구 찾아왔어? 그 총각?"
옆방 아저씨였다. 오 팀장이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어떤 사람입니까."
"그 총각? 착해!"
벽 너머에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새벽마다 옥상에서 칼 휘두르고 라면 냄새 피우는 거 빼면!"
오 팀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새벽 훈련. 라면.
예린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웃었다. 윤하는 시말서로 얼굴을 가렸다. 오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길게. 그 한숨에 이 방의 모든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다 들어 있었다.
그가 돌아섰다. 계단참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 왔네. 저녁에 시간 비워. 도망가지 말고."
* * *
그날 밤. 고시원에서 두 골목 떨어진 포장마차.
비닐 천막 안에 플라스틱 테이블 넷.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주인 할머니가 오뎅 국물 두 그릇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앞으로 돌아갔다.
그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잔은 하나만 받았다. 자기 것만 채웠다.
"너는 마시지 마. 맨정신으로 대답해."
그가 한 잔을 비웠다. 다시 채웠다.
"너 뭐냐."
"……어디서부터 설명할까요."
"처음부터. 근데 짧게. 나 피곤해."
각성 기록 없는 백수. 첫날 오우거. 게이트 사전 제보. 사교 아지트. 측정기 파손. 그림자, 방패. 그가 다 알고 있었다. 수첩 한 장에 적어 와서 하나씩 읽지도 않았다. 그냥 물었다. 너 뭐냐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거짓말 냄새를 맡는 사람이었다. 전생에 그 코 때문에 잘렸다. 백광의 돈 냄새를 맡고 거절해서.
"앞으로 열릴 게이트를 압니다."
그의 잔이 멈췄다.
"이유는 말 못 해요."
"증명해."
"모레 오전 10시, 협회 승급 시험 게이트."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협회 내부 일정이었다.
"E급인데 안에서 하나가 더 열려요. D급. 10시 40분쯤."
전생에 들은 얘기였다. 그날 협회 승급 시험에서 신입 셋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시험 게이트 안에서 갑자기 D급 균열이 열렸다고. 그 사고 뒤로 협회는 시험 게이트 관리를 외부에 넘겼다.
오 팀장이 한참 말이 없었다. 텔레비전 소리만 났다.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작년에, 내 밑에서 신입 둘 잃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피곤하지 않았다.
"준비가 안 된 애들이었어. 내가 괜찮다고 보냈지. 둘 다 스물셋이었다."
그가 오뎅 국물을 들이켰다. 식은 국물이었다. 국물 위에 텔레비전 불빛이 번들거렸다. 그는 한참 그릇 바닥을 봤다. 거기 무언가 적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윤하 씨한테 모질게 하시는 거군요."
"……쓸데없는 소리."
그가 안경을 벗어 셔츠 자락으로 닦았다. 다시 쓰지 않았다. 맨눈으로 나를 봤다.
"틀리면 너, 위험 각성자로 넘긴다."
"맞으면요?"
그가 피식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주인 할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 * *
포장마차를 나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윤하의 문자였다.
[저 모레 승급 시험 봐요! F→E! 응원해 주세요!]
느낌표가 세 개였다. 그 뒤에 주먹 쥔 이모티콘. 반듯한 사람이 보낸 문자치고 들떠 있었다.
발이 멈췄다.
……그 게이트다.
전생에 그날, 신입 셋이 돌아오지 못했다.
전생의 그녀는 그 시험에 없었다. 서울역에서 무릎이 부서진 채 재활 병원에 있었으니까. 지금의 그녀는 두 다리로 멀쩡히, 그 게이트에 들어간다. 내가 지켜 낸 무릎으로.
휴대폰 화면의 느낌표 세 개를 오래 봤다.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응원할게요.]
1분 만에 답이 왔다.
[짧아요! 더 길게!]
[많이 응원할게요.]
[……이현 씨는 문자도 백수처럼 하시네요.]
그 뒤로 답하지 않았다. 내일 협회에 가서 응시 서류를 내야 했다. 그녀 몰래. F급 등록자도 승급 시험을 볼 수 있다고, 측정회 공지 맨 아래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